주님 공현 전 금요일

2013. 1. 4. 오후 5:20:41

글자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요한1서 3,7-10; 요한 1,35-42

단체별 회의에 들어가면서 시작기도에 복음을 읽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복음만 읽고 끝내더군요. 아마도 회의를 해야 하는데 날짜상 한 달에 한 번만 만나고 있고, 게다가 토의해야 할 것도 많기에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 을 하러 성당에 온 건 아니잖습니까? 단순히 저와 일 관계로 만난 사이는 더더욱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읽고 잠시 나눔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나눔이라고 하기에 아직도 미안한 구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드는 성경구절은 찾았지만 이게 왜 자신의 마음을 울리고 있고, 그것이 지금 살고 있는 생활과 어떤 연결이 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어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쉽게 말해, 그동안 배워 익혔기에 신앙인이 가야 할 모범답안은 알고 있지만, 그게 본인의 진짜 생활과 어떤 체험으로 연결에 되어 가야하는 지에 대한 감각은 부족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두려워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남이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 복음에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날 그 분과 함께 묵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무엇을 보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 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단체에서 봉사를 하신다는 자체는 변화되었기에, 어느 정도 그 분의 맛을 보았기에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그 상태에 머물러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매일 같은 복음말씀이 실상은 매일 다르게, 다양하게 들려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은 펄펄 뛰는 활어처럼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신부님들의 강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같은 성경구절이 반복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같은 강론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 가지 단면만을 보는 말씀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우리는 안 보이는 그 분의 활동을, 보이는 언어나 행동으로 잡아서 옮겨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안 보이는 하느님이 보이는 사람이 돼서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안 보이게 심어주신 씨가 보일 수 있게 잘 자라도록 내 마음의 길을 터야 하겠습니다.

댓글 1

  • 2013년 1월 7일 오후 12:58

    알며 실천할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