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4주일 청소년 미사.
찬미 예수님. 9시 미사에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질투, 부러움,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마음.. 이런 거 말이죠..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남보다 뛰어나길 바란다면 얼마나 뛰어나고 싶으세요? (마이크를 대어 본다) 따돌림 안 당할 정도만? ㅎㅎ 솔직히 말해 남보다 좋은 환경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습니다. 그게 머리가 좋건, 재능이 좋건, 또는 가진 기술이 좋건 간에 말이죠. 자~ 대다수 사람들이 꼭 질투는 아니더라도 조금씩이지만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나도 그런 것이 있기를 바라면서요. 그럼 그걸 가지려면 어떻게 할까요?
이제부터 그것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명은 성모님, 또 한 명은 엘리사벳. 태중에 예수님을 갖고 있던 성모님이 연로하신 나이에 아이를 밴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뤄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게 무슨 말인지 설명 들어갑니다. 성모님의 현재 상태는 예수님을 임신한 상태입니다. 그런 그 분이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인사를 합니다. 이 인사는 단순히 ‘안녕~’ 정도가 아니죠. 여기서 다 나오진 않았지만 격려의 인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사벳도 그냥 보통 인사격으로 하지 않고 “여인들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는 엄청난 품격있는 인사를 합니다. 즉 서로를 격려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랬을 지 모릅니다. 만약 내가 엘리사벳이라면.. 성모님을 보자마자, ‘나도 예수님 엄마하고 싶어~’ 하는 그런 부러움 말이죠. 그런데 엘리사벳은 자기 처지에서 만족을 하면서 격려를 했고, 성모님도 성모님 처지에서 격려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마니피캇이라는 성모님의 노래가 나오지요. 자기 처지에서 일어서서 시작하는는 것. 그것이 가진 자가 만족하는 방법이지요.
더 쉽게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드놀이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카드를 돌립니다. 누구는 조커가 들어오고 에이스가 들어옵니다. 그것을 우연찮게 옆에 있는 내가 봤어요. 그러면 실망하면서 ‘나 죽을래~’ 합니까? 아니지요. 옆에 좋은 카드가 들어왔다고 게임 끝나는 것 아닙니다. 좋지 않은 패라도 그것을 가지고 게임에 임할 때, 자기가 사는 방법이죠. 자기와 남이 살기를 바란다면 서로가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격려해주세요. 그게 승리자들이 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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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4주일미사.
이제 내일이면 주님을 뵙게 됩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어쩌면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 물가도 또 오른다고 하는데, 퍽퍽하고 힘든 기분에 성탄 분위기를 얘기하기 어렵다.’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지켜보는 저도 편치 않는데 여러분들은 또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그래서 면담이나 고해 성사를 통해 여러분이 이겨나가시는 방법을 듣다보면 이런 방법이 참 많아 보였습니다. 그 방법이란,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죠. 보통 안 믿는 사람들이 해 나가는 방법을, 믿는다는 내가 그 방법을 일부러 찾아 적용하려고 합니다. 사실 여기 있는 우리들이 사회인이니까 그런 방법을 찾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방법 밖에 없을까요?
저는 여기서, 오늘 복음에 나온 두 사람의 모습 속에서 그 해결책을 찾고자 합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찾아옵니다. 서로 임신한 부인들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이렇게 인사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뒤에 나오는 말은 우리가 이미 복음에서 들어 알고 있기에 생략하겠습니다. 단지 이렇게만 짚겠습니다. 그녀가 성령으로 가득차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성모님을 주님의 어머니, 천주의 모친이라고 증언합니다. 둘 사이는 친척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 라고 증언한다는 것, 과연 인간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이런 인사를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지만, 이제 둘은 그저 알고 있던 사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어머니’ , 또 하나는 ‘주님에 앞서 미리 증언하는 사람의 어머니’ 가 된 셈입니다. 성령에 의해 사명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저 예전으로 치부하자면 동네 아줌마나 될 사람들이 말이지요. 서로의 소명에 대해 부러워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나 예수님 엄마 하고 싶어~’ 하면서 서로의 것에 대해 부러워하기보다 자신의 영역에서 하느님의 일에 동참합니다. 그래서 기뻐들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 내용에 뒤이어 나오는 내용은 마니피캇, 즉 엘리사벳의 인사에 응답하는 ‘성모님의 노래’ 입니다. 잠깐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큰일일까요?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뜻을 이루려고 하신다. 사실 하느님은, 나를 꼭 필요로 하지 않으셔도 뭔가를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지만, 일부러 당신은 나의 참여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의 원하심에 초대를 받아 동참하면서,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 이른바 신성의 동참이다. 그러므로 인간인 내가 하느님이 된다. 내가 그 분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생각과 의도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인 내가 그분의 허락을 통해 하느님이 될 수 있게 해주니,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부터 행동하고 있는 나의 움직임은, 그저 나 개인의 것만이 아니다. 그분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엘리사벳과 성모님의 대화가 기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저 주님과 내가 갑과 을의 관계, 주종관계, 종속관계 인줄만 알았는데 하느님은 그 너머의 것을 허락하시고, 당신의 영역에 들어오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분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섭니다. 이 새로운 관계를 누구도 인간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들어가면서 예전의 차원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것을 맛봅니다. 느낍니다. 그리고 행복해 합니다.
사랑하는 수유동 본당 교우 여러분
주님과 나는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믿고 있다는 이 신앙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가 보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이미 한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는 방법은 내가 이미 예상한 그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그러기에 우린 기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걸 만나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