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후 금요일

2009. 2. 27. 오후 5: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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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예식 후 금요일. 이사야 58,1-9ㄴ;마태오 9,14-15

 하느님을 알고 난 다음 사람들은 그 체험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힘을 느낍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은 무언가를 당신께 감사도 하지만 계속 갈구를 합니다. 청원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치지요. “저 이만큼 했는데.. 좀 안 봐주십니까?” “이러저러한 봉사 했는데요..” 하면서 뭔가 협상을 하는듯한 모습으로 당신을 대하곤 합니다. 혹시 오늘도 기도하면서 그런 모습 가지시지 않았습니까?

  오늘 독서에도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사람들은 참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를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이런 갈망이 있는 사람들은 대단히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는다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하지요.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을 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과연 그들이 왜 단식과 고행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이 단식이나 고행을 하는 이유는 ‘고통을 통하여 나 성스럽게 잘 살고 있으니까, 내 소원을 좀 들어달라고 카드처럼 내밀고 있는 건 아닌가요?’ 우리가 단식, 금육하고 사순기간 동안 희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저 그래야 하니까? 아니죠... 변화되기 위한 터널과 같은 겁니다. 지금까지 총 265분이 계셨던 교황님 중에 "manus(大,위대한) 이라는 칭호를 받는 분은 440년경에 계셨던 레오 대종과 604년에 계셨던 그레고리오 대종, 2분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중 레오 대 교황님은 수난에 대해 이런 시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수난의 과정을 통해 부활에 영광에 이를 수 있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여러 단식, 희생, 절제의 고통 자체에만 머무는 것 같습니다. 부활로 가기위한 여정 중에 있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하느님이 생각하는 단식이란 ‘멍에 줄을 끌러주고 억압받는 이를 풀어주고 가난한 이를 받아주는 것’ 이라 말씀하십니다. 즉, 고행을 통해 달라지는 자신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남에게는 그렇게 살라고 지시만 하고, 자신은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우린 쉽게 욕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보곤 합니다. 우리는 단식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저 굶는 것이 아니라 왜 곡기를 끊으면서 정신을 맑게 하려 하는 지 그것을 봐야 예전에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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