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5주일. 욥 7,1-4.6-7; 고린토1서 9,16-23; 마르코 1,29-39
저자 윤꽃님의 ‘헐값 노동자 시지프스’ 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지프스라면 그리스 신화에 왕이었지만 죽음의 신, 하데스를 속이는 죄를 저질러 그 벌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바위는 정상 근처에 다다를 만하면 다시 굴러 떨어져서 형벌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벌을 받는데요. 비록 긴 시이지만 여기서는 부분만 발췌하여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생에 헐값 노동자인 그는 바위를 굴릴 뿐이네
항상 같은 바위를 항상 같은 산 위로 굴려 올리네
올라갈수록 바위의 무게는 점차 증가하고
올라갈수록 그의 노동력은 점차 헐값이 되네
작업완수의 탈환을 눈앞에 두고
꿈의 깃발을 정상에 채 꽂기도 전에
그런데, 희망은 절망과 맞바꿔지네
..오늘도 욕망의 바위덩이를 굴리는 그대
... 허나 그대가 굴리는 바위덩이는 희망을 가진 절망
기쁨을 가진 슬픔, 그게 바로 그대가 살아가는 이유
환희의 성단에 도달하려는 그대 안의 꿈을 향한 리비도
그게 바로 그대에게 주어진 숙명인 것을
시지프스가 돌을 영원히 굴리는 벌을 받았듯이 우리도 무거운 마음으로 매일 을 일터로 나아갑니다. 그러면서 노동이 주는 신성함과 귀중함을 잊은 채 ‘그저 나는 돈만 받으면 돼!’ 라는 자세의 삶을 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비록 시지프스는 벌로써 그 일을 하였지만 우린 나름의 바위덩이를 매일 굴리며 고통이지만 고통의 것만은 아님을 아는데요.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갈릴레아 전역을 다니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엔 지친 기색이 없어 보입니다. 하루하루를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다른 지방을 찾아가십니다. 마치 1독서의 욥처럼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하는 나날과 같지 않은가?” 라고 어쩔 수 없는 한숨을 털어내지만 그분은 그러질 않으십니다. 과연 그분이 가진 열정의 에너지는 어디서 기인된 것일까요? 그 원천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일테지만, 또 한편 사람을 바라보면서도 나오는 듯 합니다. 바오로가 2독서에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듯 구원의 손길을 줄 때 이로인해 달라지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그들의 변화로 기쁨의 체험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비록 부족한 제자들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아니라 다시 말랑말랑하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목의 기쁨을 누리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앞의 시 마지막에서 ‘그게 바로 그대에게 주어진 숙명인 것을’ 이라고 하였듯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운명적인 과업에 놓여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당장엔 잘 모르더라도 내가 하는 일과 직무를 통해 기쁨을 얻는 가족들을 보면서 우린 나만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지프스같이 어쩔 수 없는 노예같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같은 사명을 띤 우리라면 이 험난한 시간을 분명 잘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