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일미사. 역대 하 36,14-23;에페소 2,4-10;요한 3,14-21
찬미 예수님 일주일동안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며칠 전 화이트 데이라 많은 여성들이 그동안 뿌렸던 초콜렛에 대한 답례로 사탕을 받는 날이었는데, 자매님들 그날 남편에게 애인에게 받긴 하셨는지요. 저는 주님께 봉헌하고 혼자 사는 품절남이기에 누구에게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사는 지라, 다음 달, 짜장면 먹는 블랙데이만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흥분되고 짜릿한 일입니다. 그런데 선물을 받는 것을 참으로 즐기는 우리인데, 문제는 내가 하느님께 선물을 받고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2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고요. 대다수 사람들이 선물을 받게 되면, 선물을 준 사람에게 고마워하고, 그 사람을 더 애틋이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그 선물을 준 분이 하느님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즉 하느님이 뭔가를 주시면, 받은 내가 그 선물의 포장지를 뜯고 내용물을 확인하는 데에는 열을 올릴 뿐,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별로 관심이 없기에 하느님에 대해 다시 생각하거나, 그분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거나 하는 자세가 참으로 약한데요. 하느님보다는 단지 받고 싶은, 선물만을 원하기에 그분의 아들이 누구건, 하느님의 본 뜻이 무엇이건,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받은 선물만 좋아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느님께 대한 관심이 적기에, 그분의 일하심이 내 방식이 아니라서 이렇게 대처합니다. 오늘 1독서처럼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는 자세처럼 그분의 방식보다 내 방식을 더 선호합니다. 그러면서 복음에 나오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는 말씀처럼 자기 안에서 내는 목소리가 마치 진리인양 선호하고, 주님의 방식을 가벼이 여기고 맙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방식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즉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드러나는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가 어떻습니까? 그런 십자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고, 어떻게든 토막 내서 불 질러 없애버리고 싶어합니다. 교회가 말하는 순명? 당연히 이런 자세도 희박해져 갑니다. 세상이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니까요. 그렇게 교육하는 세상의 관점이란 것은 바로 ‘나’ 를 더 중시하는 자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점은 ‘내’ 가 아닌 ‘십자가’ 입니다. 그 십자가는 아시는 대로 사형틀입니다. 세상이 볼 때 치욕이요, 굴욕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만이 잘 난체 하는 우리의 삶을 정화시켜 줄 수 있는데요.
이 십자가는 남들이 볼 수 있도록 위로 들어 올려집니다. 그럼 이 들어 올림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미사 때, 성체가 변화될 때에 모두에게 이를 알리려고 성체를 들어 올립니다. 그럼 이 빵은 예전에 내가 알던 빵이 아닌, 모습은 빵의 형상이지만 실체적인 주님의 몸이 되는데요. 그저 배나 부르고 만족했던 그 빵이 이제 나의 영혼을 치유시켜 줍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나에게 먹힘을 원하셨구나, 내가 그 몸을 모시면서, 내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고,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데요.
사랑하는 수유동 본당 교우 여러분.
이제껏 2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주님의 방식이 사람을 망쳤던 예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생명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삶의 방식을 보고 이제 내가 동참할 때입니다. 자기가 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시몬처럼 남의 것도 들어주면서, 십자가에 의한 믿음의 길이, 진정 나를 살려주고 있음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