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전 수요일. 요한 1서 3,7-10; 요한 1,35-42
여러분 젊으셨을 때를 잠시 회상해 보겠습니다. 어릴 때 우리 모두는 그랬습니다. “엄마 이게 뭐야? 저게 뭐야?”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번쩍거림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호기심 천국이 되었던 나날을 말입니다. 아무리 어린 시절에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했어도, 그 당시 관심사항은 분명 넓어 보이는 세상에 나를 드러내 보이고 싶었습니다. 나의 꿈을 위해, 나의 이상을 위해서 말이지요. 당연히 하느님의 품에서는 멀어지면서 기도나 교회 가는 것을 꺼렸던 것이 그저 요즘 아이들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우리도 그랬으니까요. 과연 당신의 품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어떻게 다가오실까요?
영국의 시인인 프란시스 톰슨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성직자가 되려 했지만 자퇴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같은 의사가 되려 했지만 의사시험에 여러 번 떨어지면서 그로 인한 좌절감 때문에 약물중독에다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다가 시련의 기간을 끝내고 회복 후 쓴 시가 ‘천국의 사냥개’ 라는 시인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그리고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 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 속 미궁 같은 길로. 그리고 슬픔 속에서도 나는 숨었네, 겉으로는 연이어 웃으면서도. 희망에 부풀어 오르다가도 두려움의 골짜기 거대한 음울 속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오는 그 힘찬 발소리로부터.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일부러 속도를 내며, 장엄한 긴박함으로, 두드린다 - 그리고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보다 더 긴박하게 -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모든 것이 너를 배반한다. .....라면서 시는 끝납니다.
이 시를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영혼의 도망입니다. 스스로를 하느님께 도망친 자로 보고 있습니다. 둘째로 영혼의 추구입니다. 여기저기 만족할꺼리를 찾아보지만 얻지 못합니다. 셋째로 영혼의 난국입니다. 하느님 없는 인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넷째로 영혼의 체포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굴복합니다. 다섯째로 연인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심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그러자 “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친절하게도 “와서 보아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형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합니다. 마치 중간에 뭐가 생략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운데 비어 보이는 이 공간은 우리가 체험하면서 찾아야 합니다.
앞선 시처럼 우리는 그분에게서 도망가려 했지만 당신 없는 인생은 의미가 없음을 이제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당신에게서 벗어나려 하고 또 한편으로 그래도 당신의 품안이 제일 안전하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이런 술래잡기는 그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불러주셨음에 감사하면서 이제 우리도 당신께 굴복하며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