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4주간 목요일. 사무엘 상 1,24-28; 루카 1,46-56
우리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사람을 포함하여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 골라보시겠어요?.... 고르셨습니까? 자~ 이제 골랐다면 이것을 그동안 어떻게 여기면서 살아오셨습니까? 그냥 갖고만 있었습니까? 아니면 귀중한 것이 더 귀중하게 되기 위하여 마치 보석이 더 광이 날 수 있게 닦아주듯이, 그렇게 계속 관심 기울여주고 사랑으로 풀을 먹이며 빳빳하거나 혹은 부드럽게 연마하셨습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할 것입니다. 그냥 가지고 있거나, 혹은 가죽을 다듬듯이 무두질을 하면서 길을 들이거나 또는 실력을 키우기 위해 뭔가 자꾸 연습을 하면서 기량을 높이는 시간과 공을 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온 사람은 좀 다릅니다. 더 이상 가지지도 않고 연마하지도 않고 그냥 바칩니다. 그것도 하느님께. 이 사람은 왜 그랬을까요?
한나는 사무엘에게 이야기 합니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맞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정결례 예식을 통해 감사를 드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또는 더 나아가 사제가 되기 위해 자식을 내어 놓습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합니까? 자식은 어느 누구도 아닌 내 자식이기에, 아이가 부모님께 ‘신부님이 되고 싶어요, 수녀님이 되고 싶어요.’ 라고 말하면 아무리 열심한 신자라도 우선 반대하면서 시작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거야?’ 하면서요.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실 아이를 주님께 바친다는 말은 그게 하느님께 뺏기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를 성장 시켜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여러 방식의 삶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필요한 삶을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장 좋은 삶이 무엇입니까? 자신만을 위한 삶입니까? 이타적인 삶입니까? 당연히 대답은 이타적인 삶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지만 내 자식은 안 되요.’ 라는 것에 머물러 있는데요. 아이를 못 낳던 여인이 기도를 통해 아이를 가지자 오히려 주님께 능동적으로 바칩니다. 이 역설적인 상황을 보며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중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무엇을 내어드리고 있습니까? 오히려 그 분은 더 주려고 하시는데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