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전 화요일. 요한1서 2,29-3,6; 요한 1,29-34
예전 남북조 시대의 승려 설차화상이 지은 시 중에 ‘벼를 심으며’ 라는 시가 있습니다. 푸른 모 쥐어 논에 가득 심고 / 고개 숙이니 물 속의 하늘이 보이네 / 마음이 맑고 깨끗하니 비로소 도를 이루고 / 뒷걸음 치는 것이 원래 앞으로 나아가는 것. 논을 보면 벼는 물에 잠겨 있습니다. 그래야만 삽니다. 보통 식물은 물조리개로 때 맞춰 물을 줘야 하지만 벼는 그런 방법을 쓰면 안됩니다. 못자리에 잠겨 있어야만 살 수 있는데요. 앞선 시처럼 고개를 숙여야만 물 속에 하늘이 보이고, 벼를 심을 때 뒷걸음치는 것이 실제로는 진정 앞으로 가는 방법이라고 얘기 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모습도 안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입니다. 벼가 물에 잠겨 있듯, 주님 안에 잠겨 사는 못자리 같은 삶이 되어야 주님을 이해할 수 있고, 뒷걸음치며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야말로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니까 말입니다.
오늘 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인들은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만 보려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요한도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고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만의 삶의 방식을 택하여 사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와 그들이 사는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거나 불안하지 마십시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는 말씀처럼 그분 안에 머무는 삶이야말로 벼가 쌀을 맺을 수 있듯,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린 그분 안에 잠겨 살면서 그 물에 비쳐진 나를 보아야겠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살아갈 때 이 방법을 따르는 삶이 진정 나를 살리는 길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네가 옳은 길이라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는 세상의 변화에 따라 계속 업그레이드, 업데이트를 시키며 꾸며 갔지만, 2천년이 넘도록 교회는 같은 방식만을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방식이 구식처럼 느껴지지 않고 항상 새로움을 가져다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방식을 다시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선택했다면 더 이상 주저함 없이 제대로 머물러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