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2주일. 생명수호주일.. 독서, 복음은 전례력대로...
찬미 예수님. 교우 여러분 일주일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대림 2주일이면서 항상 12월 첫째 주 미사는 서울대교구가 정해놓은‘생명수호주일’ 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짧은 시 한편 들려드리며 시작하겠습니다. 일본에는 하이쿠라는 시가 있습니다. 모든 글자는 겨우 17글자로 쓰여지면서 온갖 계절이 다 살아있는 방랑시인의 시입니다. 그 중에 ‘본초’ 라는 시인의 시입니다. 번역하면 이와 같습니다.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다.” 이게 다입니다. 사람이 살려고 산에서 온갖 나무를 베어다 장작꺼리를 만듭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연을 위해 해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얻어 쓰기만 할 뿐이지요. 그런 아픔을 겪고 있는 억울한 자연인데도 아무 말 없이 자기 생명을 틔워냅니다. 마치 죽은 것 같았지만 생명의 기운을 내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생명과 자연을 위해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사실 우리가 자연을 휘어잡아야 한다는 생각의 발단은 어쩌면 성경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온갖 창조활동을 펼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정말 글자 그대로 해석하였기에 온 땅을 가득 채우려 예전보다 인구를 증가시키면서 세상을 지배하려고 자연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과연 그 뒤에는 무엇이 남았습니까? 그런 발전이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 면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만, 같은 공간에 살고 있던 동․식물에겐 해를 주었다는 면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린 부자와 라자로라는 비유를 압니다. 하지만 부자와 라자로는 같은 공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라자로의 어려움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린 그 부자 같은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울부짖음을 외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전에 저는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한 ‘지구를 담은 사진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전’ 에 다녀왔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관이 연출되는 현장이 큰 사진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상어 지느러미 요리인 샥스핀을 먹기 위해, 매년 7천 3백만 마리의 상어가 지느러미만 잘린 채 몸뚱이는 버려집니다. 당연히 몸통만 남게 된 상어는 바닥에 가라앉아 다른 물고기에게 잡혀먹을 수 밖에 없지요. 또 미국 네바다 주, 모하비 사막 안에 있는 프림 밸리 골프장의 잔디를 키우기 위해 끌어올려지는 지하수로 옆에 다른 식물은 하나도 살 수 없는 사진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자연에만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임산부의 태아진단을 통해 우생적인 아이만을 받아들이겠다는 시각이나, 낙태나 안락사, 자살에 대한 문제까지 법적으로 호소하여 합리화하는 시도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서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마저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윤리적인 반성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사회가 정한 기준이 전부인 양, 아무 생각없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생명은 누가 준 것입니까? 그 영역의 주관자는 누구십니까?
사랑하는 목동 본당 교우 여러분..
신명기 3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생명은 선물입니다. 선물이 선물답게 쓰이려면 선물을 주신 분의 의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린 그동안 받은 선물을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내 방식대로 휘어잡기에 바쁘십니까? 그저 경제적인 효율성이라는 시각에 갇혀 참된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린 가까이도 봐야 하지만, 멀리도 봐야 하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