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2 주일 미사. 2마카베오 7,1-14;2테살로2,16-3,5;루카20,27-38
찬미 예수님 교우 여러분 일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제 열흘 정도가 지나면 모든 이들은 수험생과 하나되는 시기를 맞이합니다. 대한민국은 수험생을 위해 모든 것을 비켜줍니다. 출근도 늦게하고 비행기도 듣기평가 시간에는 이륙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그들을 위해 양보합니다. 저는 여기서 수험생들을 보며 묵상을 해봤습니다. 과연 그들이 12년간 올바른 공부를 해왔던 것일까? 하고요. 벌써 수시를 치뤘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여기서 논술이라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논술을 잘 쓰려면 명쾌한 결론에 다다라야 합니다. 남의 글에 반박도 해 가면서 자신의 의견에 단언을 내리는 훈련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논술을 한번 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남들이 가르쳐준 하느님의 모습 말고 말입니다. 언젠가 한번쯤은 나만의 언어로 답해야 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저는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이며 물리학자며 종교 사상가인 파스칼이 쓴 ‘팡세’에 이런 글이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라고요. 우리가 나름대로 논리 정연한 논증을 펴보긴 하겠지만 세상 유명하다는 똑똑한 사람들을 한 방에 헛똑똑이로 만드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오늘 복음에 그런 헛똑똑이 하나가 나옵니다. 바로 사두가이입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에만 충실한 귀족층이었기 때문에 특히 부활에 대한 신앙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 처음에 나온 것처럼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면서 조심스럽게 봐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 뒤에는, 숨어있는 참된 모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공적인 곳에서 말하고 있는 어법은 대부분이 서양식 어법입니다. 게다가 말이란 것은 원래 관념들의 기호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서양식 어법의 논리에만 충실하다 보면 참된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설명하지 못합니다. 즉 인간이 말하고 있는 언어에는 원래 수반되어 있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현상 뒤에 숨어있는 신비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쾌한 결론, 단언 내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깊은 맛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신비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세계관과 인간이 알고 있는 세계관은 차원이 다르다는 데 그 출발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겨우 관측하고 느끼며 살 수 있는 차원은 3차원 세계뿐입니다만 물리학에서 발견한 차원은 11차원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럼 발견하지 못한 하느님의 영역은 당연히 더 크겠지요. 이처럼 인간이 그동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비의 단계가 있음을 우선 받아들여야 하는데요.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모두가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극작가인 가브리엘 마르셀이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는 죽지 않고 내 안에 늘 살아 있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고요. 하느님의 세계관에서는 한번 사랑받고 태어난 모든 사람은 영원히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죽고 묻혀서 납골당에 갇혀 있더라도 말입니다. 이 신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의 세계관이 어디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를 보아야만 합니다.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아무리 바다를 설명해 주어도 못 알아듣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전 중세 철학자들이 하느님에 대해 설명할 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보다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 이라고요.
사랑하는 방배동 본당 교우 여러분!
오늘 강론이 좀 어려울 수 있었겠지만 하느님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나마 쉽게 설명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모든 걸 아시는 주님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간이 쓰는 지상언어로 하셨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언어는 한계를 가집니다. 하지만 주님이 행하셨던 당신의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우린 믿습니다. 여러분의 세계관도 부활적인 세계관으로 바뀌시길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