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위령의 날
어느덧 11월이 왔습니다. 교회는 이 11월을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성월로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즉 공을 나눌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굳이 나누자면 이 세상에서 살고있는 지상의 사람들과, 정화 중에 있는 연옥의 사람들, 그리고 먼저 천국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천상의 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셋은 서로 친교를 이루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기도와 희생, 선행으로 서로 도울 수 있는데 이를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고 말합니다. 미사경문에도 나오지요? 그래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고, 천상의 성인들에게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위령성월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한편 머지않아 떠나야 할 우리 자신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누구도 어떤 권력자도, 부자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 죽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더욱 죽음은 공포와 불안의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모든 걸 빼앗겨 버리는 것만 같고, 단절되어버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두렵고 불안하고 무력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이러한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압니다. 그것은 내 존재의 중심을,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살려고 할 때, 나 자신의 미래가 아닌 다른 이들의 미래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에서, 타인을 위한, 타인을 향한 존재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삶입니다.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 그것이 무의미한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억울하고 무의미한 죽음이 우리 모두를 위한 죽음이었듯이 우리 또한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모두가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면, 우리의 죽음을 헛되게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도둑 맞듯 내 생명을 앗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무의미하게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듯 죽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삶의 중심을 나 자신에게서 타인에게 옮겨갈 때 나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