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6주일. 아모스. 6,1ㄱㄴ.4-7;1디모테오6,11ㄱㄷ-16;루카16,19-21
요즘에 우리나라에도 외국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TV나 신문 등에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여러 가지 중에서 이런 말이 아직도 생각이 나는데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지하철 안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어깨를 마주대면서 잠을 잘 수가 있는지 신기하다는 글이었습니다. 좋게 보자면 서로의 어깨를 빌려주면서 서로를 의지하며 믿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생면부지인 사람끼리 안 보이는 벽을 구역정리 하듯 잘라놓고 잠을 자건, 화장을 하건 김밥을 먹건 자기의 할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었는데요.
현재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 서로에 대한 배려 없음이 우리 사이에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남의 몸에 부딪쳤을 때에 사과도 없이 지나간다거나 조용히 묵상 가운에 있는 성당에 와서도 전화를 끄거나 진동으로 하지 않는다거나 남이 열심히 고해실에 들어가 고해성사를 보고 있는데도 자기의 죄를 떨어내기에 바빠 문을 벌컥 여는 행위 등이 그것일 것입니다. 같은 공간 내에서도 참으로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 공간에서 어떤 이들이 있나 지켜보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 일텐데요.
오늘 복음의 부자와 종기투성이 거지인 라자로는 같은 공간에 있었습니다. 부자가 악독하다는 말도 없었고 라자로를 쫓아냈다는 구절도 없습니다. 하지만 라자로는 나중에 죽어 천당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죽어 지옥에 갑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바로 무관심에 있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수금 가락에 되잖은 노래를 불러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마치 졸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온갖 치장을 다하면서도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았기에 일은 벌어졌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상에서의 삶만 중요하게 여기고 나머지 영혼따위는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복음의 22절에 나온 ‘부자도 죽어 묻혔다.’ 로 끝났을 것이고 더 이상 읽을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때문에 그 다음에 이어지는 지옥에서 구원을 바라는 부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부자는 이야기 합니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들에게 경고하여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가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합니다. 그러자 죽은 이들 중에 누군가 가야 회개할 것입니다.” 라고 하자 산 사람 말도 안 듣는데 죽은 이가 왔다면 믿겠냐며 부자의 말을 외면합니다.
사랑하는 방배동 본당 교우 여러분
며칠 후면 대천사 축일을 맞이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천사들이지만 언제라도 교만하게 되면 악마가 될 수 있는 그들입니다. 그런데 우린 영과 육이 결합되어 있기에 천사들보다 훨씬 약한 것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곁에는 많은 공동체 식구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완해주고 감싸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오늘 2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나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어떤 관심과 신경을 쓰는가가 미래를 좌우합니다. 자신의 몸 관리에는 온 관심을 다 기울이며 체중계에 올라가듯이, 하느님의 사람도 자신의 영혼 상태를 시시때때로 체크하고 점검해 나가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요. 과연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잠시 묵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