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6주일미사.사도 15,1-29;묵시록 21,10-23;요한 14,23-29
찬미 예수님. 교우 여러분 일주일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여기 계신 분들을 남들이 이야기 할 때 어른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른바 성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나이가 많아서일까요? 학식이 높아서일까요? 아니면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서일까요? 아닐 겁니다. 정말 어른이라고 칭할 수 있는 근거를 꼬집어 볼 수 있다면 남이 말하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잘 설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홀로 설 수 있다’ 라는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십자가의 성 요한이 쓴 ‘어둔 밤’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감각이 메마름과 어두운 상태에 놓여지고 감각에 어떠한 양분도 전혀 주어지지 않고 텅 비었고 온통 메마를 때, 이 음식이 주어지기 시작한다.’ 고요. 즉 무슨 말이냐 하면 나를 비워낼 때야말로 채워주시는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결국 내가 똑바로 서서 잘 살고 싶다면 나를 비워낼 때 가능하다는 이야긴데요. 하지만 우린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린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니..이제 수난도 끝났고 부활도 하셨기에 제자들이랑 이쁘고 재미있게 잘 살겠거니... 하고 여겼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떠나가겠다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가 신앙적인 면에서 어른으로 커 가길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떠나려 하십니다. 그러면서 새로움으로 거듭나길 바라시는데요. 이렇게 생활 중에도 항상 새로워지려 컴퓨터를 다룰 때도 업그레이드, 업데이트를 시킵니다. 악성 바이러스며 스파이웨어 등에 걸리지 않고 변화하는 문제에 이겨나가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린... 신앙적인 면에서만은 오직 아이이기를 고집하는 것일까요? 삶에서는 어른이 되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떠나심을 예고하는 것은 우리가 참되게 잘 서길 바라는 마음에서, 참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야기 합니다. ‘나는 당신이 내 안에 계실 때 밖에서 당신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나는 당신을 이 세상의 시내 광장에서 찾았습니다만 찾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안에 계셨는데 나는 밖에서 당신을 찾아 헤메었습니다.’ 라고요. 자신을 일으켜 주는 것은 외부환경에 아니라 내 안의 하느님입니다. 그런데도 외부환경이 도움이 안 되어준다고 금방 핑계를 대며 허물어지는 대다수의 사람을 보십시오. 여러분도 그렇게 살고 싶으십니까?.. 대(大)데레사 성녀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정원에 물주는 방법에 대해서 말입니다. 첫째는 우물에서 직접 물을 긷는 것입니다. 둘째는 도르래로 줄을 연결하여 두레박으로 물을 푸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시내나 도랑물의 물길을 터서 물을 주는 방법입니다. 넷째로는 비가 내리는 방법입니다. 이 4가지 중에서 제일 물을 많이 주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비가 내리는 방법입니다. 자신이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도움으로 되어감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 안에서 말이지요..
오늘 2독서에 예루살렘의 도성이 빛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도성에는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이 빛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은 우리에게 협조자, 성령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 협조자를 통해 우린 잘 설 수 있는데요. 내 안에 협조자는 지금도 나를 위해 일을 하십니다. 하지만 내가 애써 무시하거나 외면할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방배동 본당 교우 여러분..
오늘의 남은 시간을 나의 협조자 성령을 발견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오늘까지 어떻게 커 왔는지 살펴보신다면 이 시간은 분명 기쁨과 감사로 다시 한번 충만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