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5주간 수요일. 다니엘 3,14-95;요한 8,31-42
예전에 읽은 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본당 신부님이 성당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성당이라 손도 좀 볼 곳도 있고, 어느 신자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지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떤 젊은이 하나가 정말 애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정말 힘든 지경에 있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무래도 내가 좀 도와줘야겠다’ 싶어 이 신부님은 그 젊은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습니다. “무슨 힘든 일이 있으신 모양이지요?” 그러자 그 젊은이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아니요 신부님. 신부님이 방해하기 전까지는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즉 하느님과 이야기 하는데 오히려 신부님의 끼어듬이 방해가 되었다는 이야긴데요. 여러분은 과연 주님과 얼마나 가까운 상태라고 여기십니까?
주님과 가까운 상태를 완덕의 상태라 이야기 할 수 있는데요. 13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엑크하르트라는 사람은 완덕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완덕은 하느님과 나 사이에 하느님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라고 말입니다. 즉 최단거리의 최단거리는, 둘 사이에 더 이상 사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가장 짧은 직선은 점(點)이지요. 우린 하느님과 그런 점이 되어야 하는데요.
오늘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과연 그 머무름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바로 신앙고백을 할 때 이어집니다. 이사야 29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들뿐이니..” 라고요. 남이 가르쳐 준 고백은 그 언어가 아무리 절실해도 그건 남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즉 자신과 하느님을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비록 어눌해도 어법에 맞는 것 같지 않더라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고백할 때 진정한 고백이 되는데요. 독서에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내실 것입니다.” 마치 근거없어 보이는 이 믿음의 근원은 어디서 기인되었을까요? 평소 당신과 함께 머무르면서 자연스레 터져나온 외침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누구의 종도 아닌, 참 자유인이 되기 위해 당신과 나 사이에 진정한 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