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제 직무 중에는 죽음을 다룹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유가족을 헤아리지요. 그동안 세상을 떠나신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살다간 분도 있고요. 유가족이 있긴 하지만 돌아가신 분을 아무도 찾지 않기에, 병원 시신 안치실에서 저 혼자 미사를 드린 분도 있었습니다. 결국 우린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여기 있을 때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투로 삽니다. 이런 것을 우린 복음적인 용어로 ‘어리석음’이라고 말합니다. 고린토1서 2장 14절에 나오지요.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영을 모시는 이는 헤아릴 줄 압니다. 그 헤아림은 막연하지만은 않고요. 나에게 닥칠 것을 염두하면서 준비하기에 갑자기 닥쳐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이미 벌어지고 나서야 뭔가 하는데요. 그래서 세상에서 계획만 세우는 이에 대해 2독서는 경고하시죠.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조금 있다가 향을 피우고요. 누가 그렇게 되고 싶겠습니까만은 실제 모두에게 적용되지요. 그래서 교회 묘지에는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말해주는 라틴어 문구가 있지요. ‘Hodie Mihi, Cras Tibi’ 이는 집회서 38장 22절에 나오는 “그의 운명을 돌이켜 보며 네 운명도 그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 말씀입니다.
우린 남의 죽음을 보며 내 얘기로 생각하려 들지 않습니다. 일단 거부감이 들기 때문이고요. 괜히 ‘재수없다’ 여기죠. 그렇다고 우리보다 먼저 가신 분들이 그런 경우는 아니잖습니까? 각각의 여러 사연으로 그리 되셨는데요. 우리도 나름 사연이 있는 죽음을 맞이하겠지요. 복음 말씀처럼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보듯 나름 준비는 하겠지만 또 꼭 준비대로만 되지도 않겠지요.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요?
로마서 14장 7절과 8절 사이에 나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아마 우리의 선친들께서도 같은 말씀하실겁니다. ‘너만을 위해 살지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살라고요.’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결국 답은 그렇게 귀결될 것이기에 피하지만 말고 잘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