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우린 하느님을 논할 때 변하지 않는, 불변하시는 하느님이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구하는 방식이 창세기 때 아담과 하와 때와, 모세 때와, 예수님 때와, 성령이 내린 후, 교회의 때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봅니다. 일단 맞는 것부터 살펴보지요.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내시고, 믿는 이들이 주님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내용은 구약과 신약, 그리고 지금 교리까지 통용됩니다. 어느 교회나 이렇게 말하고 있고 가르치지요. 하지만 불변하신다고 하여, 하느님이 아예 옛날 방식만을 고수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지요. 1. 탈출기에 나오듯이 구약의 파스카 구원은 어린 양을 잡아다 그 피를 집문, 문설주에 묻히면서 죽음의 기운이 그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안만 건너가게 했습니다. 이를 파스카라고 하지요. 여기에 홍해를 마른 발로 건너면서 약속된 땅으로 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랬던 것이 2. 신약의 파스카는 예전 어린 양을 죽였던 것을, 이제 예수님 스스로가 목숨을 바치는 희생제사를 보이시며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고 거부한다는 죽음마저 건너가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하십니다. 이게 부활이지요. 3. 이것이 이제 성령을 통해 이어지면서 주님의 구원사업이 교회를 통해 이어지게끔 하십니다. 이 세 가지가 다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대와 사람들의 양상이 달라지면서 거기에 맞추시는, 이른바 맞춤형 구원방식을 보이십니다.
여기에 기도하는 영성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1. 교회생활을 할 때 처음에는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능동적으로 뭔가를 이루려 듭니다. 자체적으로 하니 재미가 있고요. 거기에서 보람도 느낍니다. 이 단계가 기쁠 수는 있지만 전부는 아니지요. 여기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신부님을 만나거나 교우들을 만나면 자신이 방해받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보니 가져왔던 능동성이 떨어지거나 사라지면서, 앙심을 품거나 미워하는 때가 오는데요. 2.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이 만나야 할 두 번째 코스입니다. 이른바 능동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설계한 것이 이뤄지지 않아 실망과 좌절을 얻는 때지요. 그래서 보통 어떻게들 합니까? 이번에 못다 이룬 설움을, 다음에 오시는 신부님이나 다른 신자들에게 찾으려 들면서 남을 미워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볶는 경향을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피하거나 미워한다고 해결되지 않지요. 이런 지경은 나쁜 게 아니라 커가는 신앙인이라면 꼭 만나야 할 코스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가진 능동성은 활력적이지만 사실 너무 본능적이고 원초적이기에 조절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좌절감을 겪었다면 이제 3번째 코스로 넘어갑니다. 3. 이것이 수동의 영성입니다. 수동의 영성은 실패를 딛고 일어나, 외부적인 것들과 화해하면서 받아들이는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 몇 십 년 하신 분이라면 가지고 있던 능동성으로만 안되고요. 좌절과 실망을 겪다가 냉담으로 결론내면 안되고요. 여기에 우린 남과 자신과 화해하면 받아들이는 영성으로 돌입할 때, 내 맘 같지 않는 세상에서, 참답게 사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미워해 봐야 뭐합니까? 남 탓 해봐야 뭐합니까? 어차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복음에 이런 말씀으로 시작하지요.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은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왜 주님은 이런 초치는 이야기를 하실까요? 정말 A.D.70년 경, 외국의 침략을 받아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 서쪽 벽만 남게 됩니다. 그들은 여전히 구세주를 기다립니다만, 실제로는 이미 오셨지요. 다만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죠. 여기서 뭘 볼 수 있을까요? 1독서에 나오지요.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기회가 왔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예전 것을 고집합니다. 답보상태이죠. 앞서 주님은 백성을 구원을 하시려고 같은 메시지를 던지셨지만, 그 방식은 때에 따라 달리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요? 시대와 세대가 달라졌으니까요. ‘방식은 다르지만, 여전히 메시지는 같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고루하지 않고 신선한 방식이지요.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오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이번에 선출되신 레오 교황님이 10월 9일에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라는 첫 권고문을 발표하셨습니다. 잠시 소개하면요. ‘새 권고에서 개인적, 문화적, 사회적, 구조적 요인들이 어떻게 가난을 초래하고 그 근절을 방해하는지를 분석한 뒤 “이 모든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며 “가난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이들은, 자신들의 눈먼 시야와 잔혹함을 드러낼 뿐”이라고 비판했다.’ 고 하십니다. 즉, 가난한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여건과 장치가 있는데도, 이를 외면하는 이들은 결국 본인이 눈먼 이요, 잔혹한 이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라는건데요. 가난한 이는 예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앞으로도 있겠지요. 하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거나 방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다수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주님은 예나 지금이나 쉬지 않고 사람을 구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구라면서요? 자~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