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해인 수녀님의 시 ‘가난한 새의 기도’ 는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어 / 욕심부리지 않는 새처럼 /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주십시오 / 나의 선택은 가난을 위한 가난이 아니라 / 사랑을 위한 가난이기에 / 모든 것 버리고도 넉넉할 수 있음이니 / 날마다 새가 되어 / 더 이상 무게가 주는 슬픔은 없습니다.’ 노래합니다. 남루하고 비루해보여도 가난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강요된 가난과 선택된 가난입니다. 강요된 가난은 일상에서 쉽게 보는 그야말로 죽을 것 같은 지옥같은 가난입니다. 그러나 선택된 가난은 현실을 바라보는 도구역할을 하고요. 청빈함으로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클라라 성녀는 당시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와 삶을 보고 감화를 받아 수녀가 됩니다. 그러면서 고정된 수입은 거절한 채로, 손수 일하며 얻은 절대적 가난을 실천합니다. 봉쇄 수도원에서 행하는 이 모습은 당시 교회 안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였답니다. 너무나 힘든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그런 시각이 있잖습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라는 그야말로 차원을 넘었기 때문인데요. 독서의 말씀은 그들에게도 불편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잘나고 싶은 데 말이지요. 복음도 유랑설교가인 예수님의 궁핍한 사정이 나옵니다.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될 분이 일부러 내시며 집권층을 배려해주고 있습니다.
선택한 가난을 사는 이들은 마음 상태가 다릅니다. 클라라 성녀 전기문에 나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프란치스코를 통해 알게 됩니다. 어떤 고통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고, 어떤 고행도 격렬하다 할 것이 못 되었으며, 아무리 병이 들어도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거룩해진다고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쁨과 행복이 그보다 크게 느껴지기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도 받아들이는 영성이 될 때 나의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