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간 월요일
우리는 본능이 있습니다. 본능은 원초적이지만 야생성이 있기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다운 사람’ 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냥 쉽지 않기에 여전히 ‘자기 방식’ 으로 하려듭니다. 이른바 자기 취향, 자신의 현재 지능정도, 인식 수준 하에서 결정지으려 합니다. 당장에는 편합니다. 빠른 결정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객관화된 검증과정으로 나온 결정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라는 틀에서만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듣고 본, 또는 남이 알려준 도구로만 보면 간절함은 별로 없습니다. 쓰윽~ 보고 판단하니 말입니다.
첫 기적을 베푸신 물을 술로 바꾸신 고향에 가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진짜 고향은 베들레헴이지만 자란 공간은 갈릴레야였습니다. 그곳은 당신 입장에서 썩 만족스럽지 못한 곳입니다. 복음을 처음 알렸었지만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아는 이들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입니다. 헌데 예전 소문을 들은 왕실관리가 찾아와 “아들을 낫게 해달라” 는 요청을 해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반응은 냉랭합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을 보아온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장 아쉽기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라고 요청하자, 그제서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잘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요청’ 이 들어오면서 시작됩니다. 상대가 원치 않았는데 해주는 ‘설레발’을 치지 않으십니다. 요청이란 무엇인가요? 매달림, 믿음입니다. 하지만 요사이 사람들은 “해주십시오” 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하기보다 눈치를 보는 듯 여겨집니다. 일단 말을 건네면서 상대의 반응을 봅니다. 이른바 밀당을 합니다. 좀 이상합니다. 아쉬운 것은 나인데, 부탁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일까요? 애절함이 예전같지 않는 이유는 자기 방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독서에 나오듯 주님은 “내가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하십니다만 여전히 내 방식으로만 고수한다면 당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어떻게 믿으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