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예나 지금이나 ‘사는 것은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요. 어떻게든 미끄러지지 않고, 뒤쳐지려 하지 않으려, 자기 앞일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가끔 봉사활동은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시작이 반대입니다. 자기가 살아야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되기 위하여 상대방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지켜보면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연구하고, 일하고, 공부하고, 연마하는 이유는 자신이 잘되고자 하려함이 아니라, 남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그런 관심의 시각을 기울이고요. 끝내 그 시간과 정성이 자신도 살리고 남도 돕는 을을 가능케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전자(前者)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후자(後者)에 더 가깝습니까? 먼저 어디에 염두하느냐? 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데요. 이른바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못 챙기는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남을 여기는 자세는 같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주님은 기도합니다. 하지만 기도의 대상자는 당신 자신아 아닌, 주님을 믿는 이들이 “아버지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하나가 되게 하고, 진리를 거룩하게 되기 위함이랍니다.” 바오로도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라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즉 공동체원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각오를 다지면서 격려의 말을 던지는데요.
여기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왜 냉정하고, 인정이 느껴지지 않고, 도움을 받을 곳이 점점 보이지 않을까?’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여기엔 공통점이 하나 있지요. ‘나를 먼저 내세우는 자세’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살려고 하기에 정작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땐 도움의 손길을 발견하기 힘든데요. 우리나라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도움이 있어왔습니까? 전쟁을 통해 원조가 들어왔고요. 한국 교회도 많은 선교사들의 도움이 지금의 교회를 이룰 수 있게 했습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한 보니파시오 주교님처럼 자기 나라가 아닌 곳에서 선교를 하다가 돌아가셨는데요. 아직은 만나지 않는, 만나지 못한 그 누군가를 염두하고 기도할 때 우린 서로를 살릴 수 있습니다. 저도 학생 때, 묵주기도를 하면서 1주일에 한 번은 ‘미래에 만나게 될 신자’ 들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늘 우리가 이런 사항을 염두할 때, 목표를 잃은 우리가 방향을 다시 잡아갈 수 있을 것이고요. 게으른 내 삶을 좀 더 명확하게 챙겨갈 수 있는데요.
이런 시각을 가진 이들이 세상을 이끕니다. 기업은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가?를 살피고요. 의사들은 요사이 사람들은 어디가 아픈가? 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저도 요사이 신자들이 무엇에 사로잡혀 사는가?를 살핍니다. 이처럼 항상 타인을 염두할 때, 나도 살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