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7주간 목요일. 갈라 3,1-5; 루카 11,5-13
여러분처럼 평일 미사에 오시는 분들은 주님의 맛이 어떤 것인지 좀 아는 분들이십니다. 물론 예전부터 왔기 때문에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쯤 되신 분들이라면 좀 정리를 하고 가야 하겠습니다. 그 정리란, ‘나의 삶이 제대로 가려면 이제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라는 점입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면 거쳐야 할 필수 코스가 있습니다. 그건 내 안에서 침묵의 시간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조용하게, 침잠하면서, 마치 자유로운 의사로 독방에 지내듯이 그렇게 말이지요. 왜 그래야 하는 지 아십니까? 교회의 스테디셀러인 ‘준주성범’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항상 더 왜소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 고독 속에서 가만히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 들리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복음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갑자기 한밤중에 손님이 찾아온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친구의 집에 달려가서 호소합니다.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주게” 당연히 인간적으로 귀찮지요. 그래서 친구라도 거절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주님은 부연설명을 하십니다.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하지만 요즘 분들에게서는 이런 현장을 잘 보질 못합니다. 몇 번 해보고 맙니다. 괜히 상대방으로부터 거절을 당해서 상처 받을까봐 그렇습니까?
청하고, 찾고, 두드리고, 조르는 속에서 뭔가 아쉬운 내가 간절히 빌 때, 그 안타까운 음성이 상대방을 움직입니다. 그 간절한 속삭임이, 애타는 그 마음이 실려서 목석같은, 전혀 생각이 없던 요지부동인 사람을 움직이는데요. 우린 사람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도 움직이고 싶습니다. 내가 살고 싶어서이지요. 신앙은 예전부터 그랬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어디가 부족한가? 어떤 부분을 주님의 것으로 채우고 싶은가?’ 그런 음성을 들어야 하고요. 찾고, 간절히 원할 때, 진정한 그분의 목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