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주간 토요일. 말라 3,1-24; 루카 1,57-66
우린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이러한 압박과 유혹에 시달립니다. 그 유혹과 압박이란, '모든 사안을 예상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수준에 놔두는 것' 입니다. 그것보다 모자르거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쉽게 용납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편하고요,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비슷하지만 큰 차이를 지닙니다. 일단 여러분이 사는 거주지는 안정되어 있거나,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의 이동이지만 저 같은 경우는 서울의 곳곳을 누비거나 또는 본당이 아닌 외부이거나 외국 혹은 지방 어디일 수도 있습니다. 2년 가량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며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 예상과 범위와 다르게 흘러갈 때 나는 과연 이를 잘 받아들였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저 자신도 그리 자유롭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있게 답하지 못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 은 일이나, 사람, 환경에 이르기까지 낯설기 때문입니다. 낯설고 이질적이면 겉돌기 쉽습니다. 교우들에게 마음을 내주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저도 부끄럽지만 여전히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아기인 세례자 요한을 만나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늦은 나이에 아이가 생긴 일은 기뻐할 일이지만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이나 그로인해 즈카르야가 다시 입이 열린 사건이나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우리의 예상치를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교우들에게서 이런 것을 많이 봅니다. 즉 '변화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여러분이 살고있는 이 동네는 '정부의 계획정책' 하에서 지내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계획은 안정감과 편안함을 가져다줍니다. 해오던 방식을 당연히 선호하게 되고요. 조금이나마 다른 것을 제시하면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 마냥 대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불편하게도 상황은 계속 변하고 있고요. 또 변할 수 밖에 없는 시국입니다. 여러분이 해오던 것과 자꾸 다른 것이 제시되고 있는데요. 이제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셔야만 하는데요.
독서 마지막에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구원은 한편으로 원상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우린 그동안 변칙적인 것을 하도많이 대하다보니 그것이 마치 진실인양 오해하고 살았던 때도 많았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인양 오해했던 셈이지요. 잠시 다른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바로 잡아주는 길이 열린다면 이제 그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해야 하는데요. 오늘도 주어질 우리의 삶에서 그런 것을 만나더라도 쉽사리 놀라지 않으면서 잘 헤쳐나가시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