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4주일. 즈카 9,9-10; 로마 8,9-13; 마태 11,25-30
대부분의 우리들이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며, 신앙을 보존하며, 내 삶이 나아지길 바랍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 때는 가혹합니다. 하느님이 계신지도 잘 모르겠고요. 느껴지지가 않는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당 다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싶어서, 쉽게 당신과의 끈을 놓곤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비난하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까?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기에 약해지고 싶은 사람 없습니다. 손가락질 받길 원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당신은 반대로 말씀하시는 듯 여겨집니다. 복음에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시면서 힘들었던 당신을 본받아야 함을 말씀하시고요. 1독서는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처럼 별로 주목받지 못할, 비중없는 삶을 오히려 자랑거리처럼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말해 믿음이 견고하지 않는 교우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불편합니다. ‘아니...내가 원하는 일이 잘 되고 싶어서, 하던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고.. 가족들이 별 탈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당이라는 곳을 왔는데.. 이건 더 꼬이는 느낌이라 참 불편하네..’ 라는 푸념이 나올 수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 전에 얼마 전 개봉되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하나를 소개해 드리며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제목은 ‘아뉴스데이(Agnus Dei)’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느님의 어린 양’ 이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제 말씀을 들으시면, 하느님께 바친 어린 양이 진짜 무슨 의미인지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때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의 어느 봉쇄 수녀원이 배경입니다. 전쟁은 수녀원도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점령군인 독일과 러시아군이 번갈아가며 수녀님들에게 성적인 치욕을 강행하였고, 그로인해 일곱 명의 수녀님들이 임신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몇몇 수녀님은 프랑스 여의사를 불러 안전하게 출산을 시키지만, 원장수녀님은 이런 수치를 벗어나고자 은폐를 시도합니다. 당연히 수녀님들의 상태는 힘들었지요. 더구나 순결을 서원했던 수녀님들이기에 육체적,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고요. 처음 당한 사태에 대해 수녀원 공동체는 불안에 떱니다. 여기까지 들으셨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지요. “하느님은 왜 착한 사람들에게도 가혹하십니까?” 라고요. 결국 이들을 돕던 의사는 수녀님들을 향해 이런 제안을 합니다. ‘제가 데려온 이 아이들은 전쟁으로 인해 생긴, 거리의 고아들입니다. 이 아이들을 거둬주십시오. 그러면 이 아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없을 거에요.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그 아기들을 아무 걱정 없이 키우고 돌보실 수 있을 겁니다.’ 비록 참상으로 인해 생긴 아이이지만, 생명이기에 그들을 돌봐야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지요. 여기에 ‘하느님의 어린 양’ 이라는 제목을 다시 떠올립니다. 주님을 위해 자기를 바쳤던 것이 예수님이 임하신 어린 양의 삶이었습니다. 물론 원치않는 고통이고, 희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로인해 우리가 절망에 빠지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속에서 더 나은 것, 더 참된 것을 선택하길 바라십니다. 결국 수녀님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아이들을 돌보며 그들이 가진 상처를 치유해 가는데요.
사랑하는 개포동 본당 교우 여러분.
상처나 고통 자체에서는 얻을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를 신중히 바라보면서 방법을 찾아나갈 때, 우린 그 고통 속에서 얻는 희망을 배우고 치유가 이뤄집니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곁에 있는 이 사람들이, 다 우리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는 욕하고, 험담하고, 피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뜻하신 바는 이것이지요. ‘물론 너희가 바라는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잘 화해하고 나눠간다면 다른 어디서라도 안식을 얻을 수 있음’ 을 가르쳐주시는데요. 여러분도 그렇게 치유해 가시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