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3주간 목요일

2017. 7. 5. 오후 7: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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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3주간 목요일

  이미 복음에 나왔지만 여러분께도 같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뭐가 더 쉬울까요? 병든 사람이 일어나 걸어가는 것이 더 쉽지요.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드려봅니다. 마음이, 생각이, 완전히 굳어버린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자기 세계에 파묻혀 대화도, 나눔도 되지 않는 사람을 말이지요. 저는 예전에 그런 상황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가장 비참한 장례미사였는데요.

 저와 수녀님이 그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지만 찾아간 곳은 빈소가 아니라 시신 안치실이었습니다. 망인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분위기는 망인의 지인 한 사람이 곁에 있었고요. 고인이 입은 수의도 이 분 것이 아니라 원래는 다른 사람 것으로 마련한 것을 택배로 부쳐왔답니다. 저야 부탁을 받고 장례미사를 하러 왔지만 가족들의 마음은 저와 달랐나 봅니다. 아무도 오지 않았으니까요. 사람이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 가 어떤 것인지를 보았는데요.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요. 사랑에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 고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도 만나는데요.

  여기에 독서에 나온 아브라함을 보게 됩니다. 장면상으로는 하느님이 주신 아들을 다시 내놓으라는 설정인데요.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것이 줬다가 뺏는 것이라는데, 지금이 그렇지요. 나이 들어서 얻은 자식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성경상에는 아브라함의 심리 상태가 다 나와있진 않지만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거란다.”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이 갑니다.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이지요. 이 신뢰는 단순히 아들을 살려줄 것이라는 신뢰가 아닌,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시 일으켜주실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나중에 어찌되어 갈런지는 몰라도, 일단 그는 칼을 잡아들고 아이를 찌르려 합니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희생의 마음을 당신은 읽으십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회복되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그 희생을 통해 더 큰 사랑이 어떤 것인지, 어느 방향으로 흘러야 할 지도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이런 희생을 많은 이들이 감당키 어려운 것이라 치부하면서 현실에서만 안주하는데요.

  우리가 배우려는 사랑은 그저 몸뚱이 멀쩡해지는 차원이 아니라, 진정 한 사람을 일으키고, 살리고, 키우는 사랑입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못할 것만도 아닙니다. 이미 그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을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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