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미사. 사도행전 10,25-48;요한1서 4,7-10 요한 15,9-17
찬미 예수님 교우 여러분 일주일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며칠 전 스승의 날도 있었습니다만 저는 금요일에 학생 시절 영성지도 해주시고 또 요즘에는 고해성사하기 위해 찾아뵙는 신부님께 다녀왔습니다. 그분의 모습을 잠시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말씀은 어눌하시고, 등은 굽으셨으며, 강론을 하실 때는 무슨 말씀인지 잘 못 알아들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림이나 성탄 시즌에 특강을 하시면 중간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고 나와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떤 날엔 당신이 회식할 때 돈을 지불하겠다고 하셔서, 카운터 앞에서 카드면 다 되는 줄 알고, 현금인출카드를 내미실 정도로 사회에 대한 감이 잘 없으신 분이십니다. 상황이 이쯤되면 다른 사람 같으면 남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뭔가 창피한 마음을 가질 만한데, 당신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떳떳치 못한 우리를 보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논어에 술이편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네들은 내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나는가? 나는 숨기는 것이 없다. 나는 행하면서 자네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바로 이것이 나이다.” 라고요.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의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과 제자사이의 숨김없는 모든 것을 보여주십니다. 스승의 투명하고 당당한 삶의 모습은 삶과 가르침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뭔가 잘 보이기 위해 꾸미기 바쁩니다. 요즘 사람들의 병폐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봐줄까?’ 하는 문제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초창기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에서도 아주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찾아와 ‘선생님이 묵고 계시는 곳을 알려주십시오.’ 하였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시오” 라고요. 훗날 유다가 배반하여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당신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내가 숨어서 말한 것이 아니라 회당에서 공공연히 가르쳐 왔는데,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트집이냐?” 고요. 공자 또한 제자들과 관계에 있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놓는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당당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당당함을 가진 분의 말씀은 힘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고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도들을 보고서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 라고요. 그분의 말씀에 힘이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좋은 말, 좋은 이야기는 누구나 할 줄 합니다. 하지만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요. 진정한 스승은 자신의 가르침과 삶이 동일시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들의 눈보다 하늘에 계신 그분을 더 두려워하며 지내는 삶이 될 때, 우린 어떤 것에서도 거칠 것이 없으며 그분처럼 ‘아~우리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자신감에 벅차오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태원 본당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 제일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어느 누구의 눈이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직 하느님의 시각에만 충실하셨기에 그 큰 사랑을 몸소 실천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어떻게 행하시겠습니까?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아직도 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은데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