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4,23-31; 요한 3,1-8
김경렬씨의 ‘장애인의 날’ 이란 시를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산길을 걷다 보면 난관에 봉착되지 / 필요한 풀뿌리도 부여잡고 지나지 /장애는 서로 손을 내미는 그런 사이지
들길을 가다 보면 수렁에 빠지기도 하지 / 절실히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가
작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런 일이지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지 불편할 뿐 /불편해 보인다고 폄하해선 안되지
서로 발맞추고 어깨동무하며 웃으면 /땀이야 솟겠지만 즐겁지 않은가
장애는 불편할 뿐 도움 주면 더 좋지
오늘은 안 그래도 1999년에 제정한 ‘장애인의 날’ 입니다. 분명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나라가 관심을 가지듯이 교회도 그들의 인권에 더 관심을 나타내자는 날인데요. 우리는 분명 육체적인 장애인에게도 사랑을 가져야 하겠지만 영적인 장애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복음 중에 바리사이파인 니코데모는 주님을 찾습니다. 그런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그가 반박하기를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라고 답합니다. 그야말로 동문서답입니다. 우리야말로 딴 이야기를 주님께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린 더 이상 영적인 장애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미 하느님을 안 지도 꽤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우린 아직도 미진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당신은 구원이라는 달을 가리키는데, 우린 아직도 현실의 빵이라는 그분의 손가락 끝만 바라보고 있는 때가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부족한 구석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을 서로 욕한다 하여 나아질 기색은 없습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지팡이는 무엇인지, 기분을 달래줄만한 말 한 마디는 무엇인지 배려해줄 때 영적인 장애인인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조금씩 장애를 가진 그들을 어떻게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구원되고 싶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