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 2 주일미사. 사도4,23-35; 요한 1서 5,1-6; 요한 20,19-31
교형자매 여러분 일주일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여러분께 퀴즈 하나 내면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때 제자들과 함께 더불어 생활하실 때와, 부활하고 나신 다음에 뭔가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바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는 인사를 하신다는 점입니다. 예전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이런 인사를 하지 않으셨는데 왜 갑자기 예전에 하지 않던 인사방법을 하셨을까? 의아하게 생각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는 인사는 유다인들이 평상시에 쓰던 인사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예전의 약속을 이뤄주시겠다는 평화입니다. 그 예전의 약속이란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평화를 여러분에게 남겨주고 떠납니다. 내 평화를 여러분에게 줍니다.” 란 약속이었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제자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이겨내도록 격려하는 부활과 관련된 인사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미사 중에 서로에게 인사하는 평화의 인사에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사를 미사를 통해 매일, 매 주일마다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곤 합니다. 뭔가 이것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배운 학습방법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배운 것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모든 것을 오감으로 보고 느끼고 만져봐야 알겠다는 방식입니다. 물론 직접보고 만져본 다음 판단하면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 오감이란 자체를 내가 얼마만큼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 느낌의 미묘한 세밀함마저 내가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연세가 드신 분들이 간혹 ‘고기맛이 변했어’ 라는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과연 고기맛이 변했던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나의 상태가 변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감각이라는 것이 영원불멸 확실하게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긴데요. 이것뿐만 아니라 아직도 과학으로는 다 설명 못할 일, 의학적으로 분석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우리는 복음에 주인공인 토마스 사도를 만납니다. 많은 이들이 불신앙을 가진 제자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만 우리도 그런 모습을 가질 때가 얼마나 많아 보입니까? 보고서야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만져봐야 알겠다는 모습은, 믿음의 차원이 아닌 감각의 차원에서만 머물겠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현재 내 자신의 믿음의 정도가 이것이다.’ 는 증거물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어야 합니까? 그저 내 소원 이뤄주는 신앙, 나의 안녕만을 바라는 신앙의 차원에서 머무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그럼 부활신앙은 무엇입니까? 2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우린 주님을 통하여 세상의 차원에서 머무는, 맴도는 차원을 벗어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성령을 받아라.” 는 말씀을 통하여 육적인 존재에서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록 몸은 현실에 있지만 영원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탈바꿈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탈바꿈 되는 사람은 토마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는 말씀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태원 본당 교우 여러분
우린 다행스럽게도 당신을 보고 믿지 않았습니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행동은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수준의 신앙입니까? 아니면 현실의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면서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신앙의 차원입니까? 이제 당신의 부활로 모든 것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나의 갈림길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잠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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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 2 주간 어린이 미사
신부- 예수님이 부활하셨어요! 여러분 저번 주 부활 성야 미사, 그리고 부활대축일
미사에 나오셨어요? 여기 제대위에도 있지만 부활초를 들고 '그리스도의 빛'
이라 외치면서 우리 모두가 주님이 부활하심을 반겼듯이 그렇게 빛으로서
밝음으로 당신이 오셨어요.
그런데 봉달이도 이런 현장을 보았어요?
봉달- 뭐라고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요? 어디요? 어디계신데요?
안 보이는 예수님이 어디 계시다는 거예요?
여기 있는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저 같은 세대의 어린이들은
모두 미디어 세대의 어린이들이예요. 즉 보이는 것들 많잖아요..
휴대폰, PMP, DMB, 위.. 등과 같은 것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 내게 가져다 주어지지 않으면 잘 모른단 말이예요.
이걸 아셔야죠 신부님~~~~~~
신부: (휴대폰 하나 없는 게 말은 잘 해요.) 그런데 말이다. 봉달아
너는 누구한테서 태어났지? 너 네가 태어나는 현장을 봤니?
봉달: 아이~ 신부님도~ 제가 누구한테 태어났겠어요? 바로 엄마지요. 엄마
김봉달의 엄마. 전 왈숙 여사의 아들이잖아요. 아이 참~ 그리고
자기가 태어나는 현장을 본 사람이 어디 있어요? 농담도 잘하셔~
신부: 봉달이 너는 네가 태어났는 것도 못 봤는데 어떻게 엄마에게서 태어났다고
그렇게 믿을 수가 있지?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느냐 말야..
봉달: 어~ 엄마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럼 우리 엄마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오늘도 성당 잘 가라고 아침 먹여 보내줬는데... 그럼 아빠 말대로 나 다리 밑에
서 주어온 거야? 으앙~~~~~ 울먹, 울먹, 훌쩍, 훌쩍 흐느낌 흐느낌...
신부: 아냐.. 넌 엄마한테서 태어난 것이 맞아, 하지만 네가 못 봤다고 해서 모든 것이
없다,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부활을 못봤다고 한 오늘 복음
에 토마스도 마찬가지였어요. 다른 제자들이 다 예 수님을 봤다고 하니까 토마스
는 괜히 심통이 나 가지고 “주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 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
소” 말을 하 는데요. 우리 어린이들도 내가 보지 못했지만 내가 사용해보지 못했지
만 이뤄지고 있는 것들이 참 많아요.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도 안 보이지만 사실상 있잖아요? 그쵸?
봉달 : 맞아요. 저도 제 반에 있는 어떤 여학생을 좋아하는데요. 그 마음이 보이지 않지
만 그 열렬한 저의 정성은 제가 봐도 대단한 것 같아요.
신부 : 봉달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그 여학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안해 봤니?
그래 농담이고....
안 보이지만 분명 세상에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들도
주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괜히 안 보이고 안 느껴진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예요.
이번 주간도 다음 주 미사 오기 전 까지 그 안보이는 사랑을 느껴보는
시간 마련하세요..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