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5주 월요일. 다니엘 13,1-62; 요한 8,1-11
남성 형제분들이시라면 목요일 밤마다 방송되는 ‘100분 토론’ 이란 프로그램을 보셨을 것입니다. 현 시대의 이슈가 되는 여러 사건을 다루는 이 시간에 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어찌 저럴 수 있냐며 어느 사이엔가 우린 토론형식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것을 아십니까? 쇼펜하우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토론술은 진리를 찾는데는 관심이 없다. 이것은 검객이 결투를 초래한 언쟁에서 누가 옳은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요. 즉, 이기고 지는 것만 관심 있지, 정작 찾아야 할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에 관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토론에서 진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몰락이요,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제일 긴 수산나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수산나를 탐낸 두 재판관은 엄청난 권위를 가졌습니다. “그들이 백성의 원로이며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회중은 그들을 믿고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라는 말씀처럼 그들의 권위에 눌려 수산나는 제대로 항변도 못한 채 어려움에 처합니다.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 이란 책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상대로부터 존경을 받는 권위를 누리고 있을 때, 우리는 논쟁에서 쉽게 이길 수 있다. 상대의 지식과 능력이 모자라면 모자랄수록, 그만큼 우리가 누리는 권위는 더 커지게 된다.” 는 말처럼 아무 능력없고 순수한 수산나는 이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두 노인은 ‘이왕에 가지지 못할 바에야 파괴해 버리겠다.’ 는 심산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권위의 힘을 통하여 말입니다. 여기에 거룩한 영으로 둘러싸인 다니엘이 등장하면서 일은 해결되게 되는데요.
문제는 욕심과 이기심의 범벅이 된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인이 갖춰야 할 성덕을 어떻게든 무장해제 시키려 세상의 힘을 가지고 우리를 현란케 만듭니다. 그러다보면 우리가 갖고 있던 것이 참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약하게만 느껴집니다. 우리가 부르짖는 사랑, 평화 등이 말이죠. 오늘도 여러 권위의 힘에 눌려 참다운 것을 못 볼 수 있는 상황이 올 지도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도록 말이죠. 그럴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진정 나를 밝혀주는 그분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그런 세력이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믿을 때,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숨 쉬고 계신 주님의 힘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