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3주일

2009. 3. 14. 오전 11: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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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사순 3주일. 탈출기 20,1-17; 고린토1서 1,22-25; 요한 2,13-25

 찬미 예수님. 교우 여러분 일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강론하기에 앞서 옛날이야기 하나 해보겠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벼랑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밑으로 굴러 떨어지다가 간신히 작은 나무 가지를 붙잡았습니다. 그것을 잡고 쳐다보니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천 길이나 떨어져 있는 바위 사이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가지를 오래 붙잡고 있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 하고 온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하느님!” 하고 다시 외치면서 “당신이 존재하시면 나를 구해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믿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칠 것을 약속합니다.” 말했습니다. 하지만 침묵의 시간만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엄청나게 우렁찬 목소리가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그게 모두들 곤경에 처했을 때 하는 소리지” 너무 소리가 우렁차서 그 가지를 놓을 뻔 했습니다. “아닙니다. 하느님 그게 아녜요. 저는 다른 사람들 같지 않다고요. 보세요. 저는 직접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 벌써 믿기 시작한 것을 모르세요? 이제 하실 일은 저를 구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의 이름을 세상 끝까지 전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좋다. 널 구해주마.”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 가지를 놓아라.” 이 말씀에 그만 마음이 산란해진 그가 외쳤습니다. “가지를 놓으라고요? 제가 미친 줄 아세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가지를 놓았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붙잡고만 있었을까요? 우리는 내가 예상하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것만 보려고 하고 그 범주 안에서만 행동하려 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길을 가다보면 그것이 꼭 그렇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2독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씀처럼 사실 십자가의 모습은 우리가 피하고픈 모양새입니다. 지금이야 십자가가 쥬얼리 처럼 멋지게 세공되고 가공되어 있지만 십자가는 원래 사형수의 처형도구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것을 성당에 크게 걸어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 볼 때 치욕적인 일이요, 참 창피한 일입니다. 남들은 집에다가 좋은 것을 걸어놓는데 우린 그 반대의 것을 걸어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린 왜 이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것일까요? 치욕적인 도구이고 혐오적인 도구이지만 이것을 통해 구원이 왔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참다운 완성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린 내 인생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사십니까? 바쁜 생활, 어찌 될 지 모르는 불안한 시대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쪼개어 많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물론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바쁜 시간에 안식일을 지키라 하십니다. 주일을 지키라고 십계명에 적어놓으십니다. 게다가 오늘 복음에도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십니다. 이것은 세상걱정꺼리를 성당까지 들여다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자매님들은 가정에서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밖의 일을 가지고 집에까지 들여다 놓지 말라고요.’ 사업은 밖에서 하고 집의 일은 가정과 함께 하라고 말입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가정은 가족간의 구성원이 만들어가는 곳이기에 밖의 일이 개입되어선 참다운 가정의 모습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구절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2장 21절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라구요. 하느님이 주신 소중한 시간 중에서 하느님의 몫을 돌려 드릴 때 내가 살아가는 이유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린 하느님이 주신 소중한 시간 중에서 그 한 시간마저 당신께 돌려드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결핍되어 가는 지도 모를 때가 많아 보입니다. 교무금만 십일조 내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시간도 십일조 드릴 때 우린 진정한 봉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태원 본당 교우 여러분!

 이론적으로 볼 때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만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균형적인 모습을 가져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맹자에 ‘비례지례(非禮之禮) 비의지의(非義之義)’ 란 말이 있습니다. 즉 예 같으면서도 예가 아닌 것을 말하고, 의 같으면서도 의가 아닌 것을 말하는데요. 즉 학문이 깊고 도덕적 수양이 높은 사람일수록 도리에 밝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린 어쩔 때 너무 사리에 밝기 때문에, 이치에 밝기 때문에 참다운 지혜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어리석음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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