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연중 제15주일]12제자 파견 (마르 6,7-13)
오늘은 연중 제15주일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전례 때에 선포되는 말씀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 뵈올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청하며, 감사와 사랑의 열린 마음으로 주님께 귀를 기울입시다.
아모스는 예언자의 길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남왕국 유다 출신이면서도 하느님의 명에 따라 북왕국의 베텔에 가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임금과 사제의 권위도 아모스가 전하는 하느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아모스 7,12-15)
에페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마련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우리는 그 말씀을 믿을 때에 약속의 보증인 성령을 받는다.(에페 1,3-14)
사도들은 예수님의 파견을 받아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다.( 마르 6,7-13)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마르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마르 6,7)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주로 혼자 활동하였습니다.
기득권층들이 싫어하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온갖 박해와 모욕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홀로 파견하시지 않고 둘씩 짝지어 보내시네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소명은
홀로 독불장군처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행여 빠질 수 있는 오류나
위험으로부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라는 뜻이었을까요?
여하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동반자 내지는
협력자를 항상 보내주십니다.
오늘은 나의 조력자로◆
나와 하느님 나라 여정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 이가
누군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가 없으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2015.07.12.|작성자 알타반
타당하고 옳은 말인 줄은 잘 알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있습니다. 아마츠야는 아모스가 전하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더욱이 남왕국 유다 출신인 그가 북왕국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리라고 외치고 있으니 결코 달갑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모스도 본인이 자원하여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가서 그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하느님께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 모두가 그 말씀을 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청중 가운데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하고 말하면서 많은 이가 예수님 곁을 떠나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말씀은 듣기조차 거북하고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혀 그분의 말씀을 짊어지고 그분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속해 있는 시대와 사회의 양심 역할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은 힘이 없고 억눌린 사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사람, 자신의 의사마저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늘 기구한 삶을 살다가 비운에 이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언자들의 이러한 신원과 역할 때문에 그들의 삶은 늘 그렇게 고달팠는지도 모릅니다.
아모스도,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오늘 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와 아마츠야의 경우처럼, 힘 있고 가진 사람의 눈에는 예언자의 외침이 늘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해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사회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기에 그들은 예언자들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사실 지금까지 제거하여 온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시대에 하느님을 대신하여 양심에 호소하는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에 따라 우리가 먼저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도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용감하게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에페소서의 말씀대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하느님의 소유로 속량될 것입니다
<빈손으로> 송영진 모세 신부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7-9)."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빈손으로' 떠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의식주를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다른
민족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믿음 없는 태도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걱정하지 마라."는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그러나
걱정을 안 한다고 해서, 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믿고 맡긴다고 해서, 자기가
해야 할 일도 안 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빈손으로' 떠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준비마저 하지 말라는 뜻이 되는 것이 아닌가?
1)
예수님의 명령은, 일차적으로는
물질적인 것들을 믿지 말고 '하느님만' 믿으라는 명령입니다. 따라서
'빈손으로'는 사실상 '빈 마음으로'입니다. 세속적으로는
'빈 마음'이지만, 신앙적으로는 '믿음으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또
세속 사람들의 눈에는 '빈손'으로 보이겠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믿음과 은총으로 가득 차 있는 손입니다.
2)
예수님의 명령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것들은 모두 버리라는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명예, 권위, 지식, 경력, 학위... 그런 것들은 모두 버리고 오직
믿음과 복음 선포에 대한 사명감만 가지고 가라는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신의 지식이나 경력이나 학위 등을 내세운다면, 또
그런 것들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전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2코린 10,17.공동번역)."
3)
더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자신을
버리고' 떠나라는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지금
겉으로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상황이지만, 사실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도들도 그렇지만,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기 때문에 그 길에서 '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계실 뿐입니다.
4)
이 명령은 사도들의 복음 선포 여행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에도 해당되는 명령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이
여행은 '세속적으로는' 빈손으로 가야 하는 여행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가야 하는 여행이고, 그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것들만 가지고 가야 하는 여행입니다.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마태 19,21).
5)
사도들은 물질적으로는 빈손으로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믿음으로 가득 차서 떠났고, 기쁨으로
가득 차서 돌아왔습니다(루카 10,17). 이것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은총을 나누어 주기 위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사도들에게도 은총을 주기 위한 일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여행은 사도들 자신들에게는 더
큰 은총을 받기 위한 영적인 여행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길도 영적 여행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것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출세를
바라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되는 것은 영원한 구원, 생명, 평화, 행복 등입니다. 세속
사람들이 바라는 부귀영화 같은 것만 희망한다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고'를 하신 것이 아니라 '명령'을 하셨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의 명령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계명(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기
싫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지금 우리는(나는) '빈손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가? 물론
예수님의 명령은, 모든
신앙인들이, 또 교회가 거지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하고,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하면서 (온갖 핑계를 대면서) 자꾸만
예수님의 명령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심각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그토록 아름답던 모습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사도 5,1-11)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잃게 된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연중15주일 (마르6,7-13)
한 눈 팔지 마라 반영억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안고 살지만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이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일깨우고 그분의 바람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담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를 파견 하셨습니까? 사도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대로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주심”과 당신의 가르침, 즉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명은 열두제자에게 국한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마귀를 끊어버리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기초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을 입었고 파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주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꿋꿋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묵히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의 처신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융통성 없는 사람취급을 받습니다. 신호위반, 속도위반, 음주운전을 하고도 단속에 걸리지 않았다고 자랑 삼아 얘기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나도 모르게 내 가치관을 흐리게 하고 잘못된 것을 합리화하게 됩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는 것은 어둠의 세력이 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호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기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른 생각으로 원칙을 준수하고 근본에 충실한 것이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일이 결코 먼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인간적인 유익 때문에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내 것을 먼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분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짝을 지어 파견한 것은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말해주는 관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복음의 선포는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이 함께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야할 길을 갈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말고 협력자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시편에서는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55,23)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되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웃과도 함께합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하는 척할 수는 있겠지만 진심으로 함께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 눈 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옛 말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고,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제가 마음먹고 돈을 쓴 적이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고급사진기를 사서 자동차 뒷자리에 놓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가정 방문을 하고, 봉성체를 하고 할 때 문득 문득 그 카메라가 생각났습니다. 정성으로 기도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시간에 자동차 문을 잠갔나? 누가 가져가면 어쩌지! 하고 마음은 카메라에 가 있었습니다. 고급 카메라 때문에 쓸데없는 근심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본당신부 발령 받고 새 자동차를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 긁어 놓으면 어쩌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물질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렸습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입니다. 주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면 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신부님으로부터 잔소리 듣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거기다 돈도 내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려고 하니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기도하러 왔는데 왜 그리 말이 많고 설치는 사람이 많은지…..밖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힘을 비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채워주십니다. 더 큰 마음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이사41,1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을 전하는 가장 큰 몫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의로움을 선택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접하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충직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 열매는 주님이 주십니다. 주님의 뜻을 행했으면 결과에 연연해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흘린 수고와 땀은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일의 결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온종일 땀 흘리며 고랑을 파듯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길을 파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해 어떤 좋은 결과를 이루었을지라도 가까운 이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낙담과 실망에 빠져서 일할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안에서도 당신의 일을 한결같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가 무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의로움을 통해 주님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서 주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쁨을 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만드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지켜줄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성경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하고 선언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랑의 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출세와 물질에 치중하고 있는가? 점검하고 사랑의 삶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가? 데리고 사는가? 자문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적축복을 전하며 또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사랑합니다.
한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도둑질 하는 것과 거짓말 하는 것 중에 어는 것이 더 나쁜 거예요?” 엄마는 이이에게 “그야. 도둑질 하는 것이 더 나쁘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엄마, 아니예요, 거짓말이 훨씬 더 나빠요. 왜냐하면 도둑질 한 것은 돌려 줄 수 있지만 거짓말은 돌려줄 수 없잖아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과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때 본이 아니게 거짓말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 한 약속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한 약속을 꼭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