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이민의 날) 착한목자 (요한 10,11-18).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聖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교회는 이 모두를 존중하는 가운데, 오늘 성소 주일은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한 날이다. 성소 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였다.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꾸준한 기도와 필요한 활동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주교회의 2000년
춘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해외 원조 주일’의 바로 전 주일을 ‘이민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사도좌와 뜻을 같이하여 정한 이
이민의 날은 2005년부터 5월 1일(주일인 경우)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 오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민의 날을 정하면서 이 땅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사목적인 관심을 더욱더 기울이기로 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에게서 온다고 선포한다.
사람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바로 그분이 우리 구원의 원천이 되신다(사도행전 4,8-12).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기에 하느님 자녀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온전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완성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우리도 언젠가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 1서 3,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으시며, 흩어진 양들을 하나로 모아 당신의 양 떼가 되게 하신다. (요한 10,11-18)
시편 118(117),1과
8-9.21-23.26과 28-29(◎ 22)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사람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제후들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
○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
○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저의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문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는 형식으로 “나는 ……이다.”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는 목자다.”가 아니라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나쁜 목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나 즈카르야서를
비롯한 구약의 예언서들에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있었던 나쁜 목자들을 비난합니다. 목자가 약한 양은 전혀 돌보지 않는 가운데 오히려 튼실한 양을
잡아먹거나 양털을 깎아서 돈만 벌려고 한다면 분명 나쁜 목자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나쁜 목자들을 없애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착한 목자를
보내시겠다고, 아니 당신께서 몸소 양들을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양털만 깎아 팔아먹는 나쁜 목자가 아닌,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성소 주일에는 여러
가지 행사도 하면서 많은 젊은이가 착한 목자 예수님을 따라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기도도 하겠지요. 목자가 되려고 한다면 반드시 착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잘못된 것입니다. 따뜻한 양털 덮고 세상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목자가 되는 것은
성소가 아닌 하나의 직업일 뿐입니다. 착한 목자가 되려면 먼저 침묵과 인내 가운데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성소 주일에 복자 바오로
6세 교황님과 함께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는 사제들에게 넓은 마음을 주소서. 침묵 가운데 힘차게 타이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며, 온갖 불미한 야심과 덧없는 인간 경쟁을 전혀 모르는 마음, 거룩한 교회만을 걱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보려는
넓은 마음을 주소서 …….”
<나는 착한 목자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요한 10,11-13)."
이 말씀은, 아직 신앙을 갖기 전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누가 '착한 목자'인지, 누가 '삯꾼'인지를 잘 보고 판단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삯꾼'을 따라가지 말고 '착한 목자'만 잘 따라가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또 이 말씀은, 신앙인들은 '착한 목자'의 '착한 양'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리'가 왔을 때,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데, 양들은 착한 목자를 버리고 달아난다면? 달아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리' 편에 선다면?
교회 역사를 보면, 종교 박해 때에 순교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배교자들도 많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종교와 신앙보다도 세속적인 사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배교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예수님께 착한 목자가 되어 달라고 청할 수 있을까?
물론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에 본의 아니게 잃은 양이 되었다면, 포기하지도 말고, 기다리기만 하지도 말고, 목자에게 되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는 목자에게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목자에게만 자기를 찾아오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회개를 거부하는 모습이고, 교만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 아버지는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작은아들 자신이 아들의 자격을 스스로 버렸을 뿐입니다. 그 자격을 되찾으려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됩니다. 자기가 버린 '아들 자격'을 되찾기 위해서 스스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삯꾼'이라는 말에서 '성전 정화' 사건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16). 이 말씀은 사실상 당시의 사제들과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장사를 하는 회사가 아니고, 성직자들은 '삯꾼'이 아닙니다. 그러니 교회를 회사처럼 운영하면 안 되고, '사목'을 장사하는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예수님의 양들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목숨을 내놓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요한 21,15-17). 신자들 쪽에서도 세속적인 이익이나 얻으려고 교회에 다닌다면, 그것은 목자와 함께 사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삯꾼을 상대로 거래를 하는 일이 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이 말씀에서 '안다.' 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깊은 사랑과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그렇게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 일치에 우리도 참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따라서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아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알아야 한다." ("내가 너희와 하나가 된 것처럼 너희도 나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는 "나는 아버지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처럼 너희를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는다."입니다.
여기서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은 '사랑'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요한 15,13). '사랑'이란 일방적인 일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라는 말씀과 거의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 아니라,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은 죽고 끝나버리는 일이 아니라, 사실은 영원히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0,17-18).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 것도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바치는(봉헌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되는 일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하느님(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는 일입니다(요한 14,2-3).
|
[성소주일] 정진석 추기경이 성소자의 길 가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
|
|
여러분이 ‘그 부르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
|
▲
오늘은 부활 4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봄날에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과 은혜를 충만히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성소 주일을 맞아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들이 성소의 고귀함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소(聖召)란 거룩한 부르심을 말합니다. 이 부르심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성직자·수도자로 부름 받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제가 아닌 사람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평신도 역시 착한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행복한 삶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저를 부르시고 함께하시며 지켜주신 하느님 저는 어려서부터 성당에서 복사(服事)를 하다 자연스럽게 성소(聖召)의 싹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위기도 있었습니다. 중앙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5년에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당시 극도로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탓에 잠시 동안 무신론 유물론에 흔들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7년 사순절에 명동성당에서 열린 사순절 특강에 참석했습니다. 그 특강에서 윤형중 신부님께서 강의하신 '영혼의 존재 하느님의 존재'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확고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강연을 윤형중 신부님이 1952년에 「종교의 근본 문제」라는 책으로 출판하셨는데 2003년에 같은 취지의 책을 현대인에 맞게 「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는 제목으로 제가 새롭게 출판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어린 시절부터 발명가가 되어 많은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을 겪으면서 모든 무기들이 발명품임을 보았습니다. 발명품을 '선용하느냐 악용하느냐' 하는 사람의 마음이 발명품 자체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으면서 저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성실하게 받드는 성직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저를 부르시고 함께 하시며 지켜주셨습니다. 기도·묵상하며 용감하게 응답해야 지금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함께할 일꾼을 부르십니다. 여러분도 그 부르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길을 따라 사는 생활 그 자체가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만약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열심히 기도하고 묵상하여 용감하게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저도 항상 우리 교회에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또한 부르심에 응답한 사제들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목숨을 바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하느님의 뜻을 만방에 펼쳐나가는 일에 헌신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
|
| [평화신문 2015.04.26 발행] | |

목숨을 내놓는 사랑 - 허규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목자를 예수님은
착한 목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의 반대말은 ‘나쁜 목자’가 아니라 ‘삯꾼’이라고 표현됩니다.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그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바뀝니다. 목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양들’이고 삯꾼의 목적은 말 그대로 그가 받게 될
보수입니다.
그렇기에 목자와 삯꾼이란 표현은 특별히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어떤 자세로 양들을 대할지, 무엇이 그들의 목적인지 잘 나타냅니다. 교황님도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제들을 향해 양과 함께하라는, 그들과 하나 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무엇이 그들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는 표현에서 이미
예수님의 드라마를 알고 있는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착한 목자에 대한 언급은 단지 하나의 비유를 넘어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시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착한 목자처럼 양들을 위해, 곧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제1독서에서 이것을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받았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오로지 그분에게만 구원이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예수님의 사건을 요약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죽음에서의 부활.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부활에 대해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어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다시 목숨을 얻는다.” 이 안에서 죽음과 부활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 1서에서도 동일하게 표현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우리가 그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통해 얻게 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현실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자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부활을, 그리고 죄 많던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가능케하는 힘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들은 모두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죽음을 이긴 부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알 수 있는 주님의 사랑 그리고 목자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모습 역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용어입니다.
각자의 체험에 따라 사랑은 그 모습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막연하게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의 것을 표현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에서 들은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부활 시기를 지내면서 이제 우리는
부활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이 전해주는 부활의 의미는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합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린 것을 기억하는 날이면서 좁은 의미로는 사제, 수도 성소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도 성소자를 걱정하는 소리가
많아졌습니다. 훌륭한 젊은이들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투신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99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이태리 로마 성서대학(Pontificio Istituto Biblico) 성서학 석사학위를, 독일 뮌헨
대학(Ludwig-Maximilians-University Munich)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성서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한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성소주일에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는 자매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데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사제로 사는지 24년이 되어 가는데 어떻게 지낼 만한지요?” 저는 그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지낼 만한 것인지, 아니면 마지못해서 지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제 생활이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시장에서 물건 바꾸듯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게 이런 이야길 하시더군요. 둘째 애가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데 사제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참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제가 대답도 하기 전에 한 자매님께서 이렇게 답변을 하셨습니다. “처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맡은 신자들을 열심히 돌보며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친절하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수도자나 사제들의 독신을 단순히 효과적인 사목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효과주의나 경제마인드로 접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목활동만 잘 한다면 독신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내 주위를 돌아보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1년이 지나도록 한번 입지 않는 옷도 있습니다. 몇 년 째 듣지 않는 음반도 있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포기하지 못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을 버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여행을 가면 따로 방을 마련해 주시는 교우들의 배려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다른 분들은 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사제라는 이유로 음식을 갖다 줄 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자가용으로 모시러 오고,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아니라고 지하철 타고 버스타고 간다고 말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은 필요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죽어가기 때문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안도현님의 ‘가을엽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 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며, 나의 모든 것 주님께 돌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요한 10,11.14)
성소주일입니다.
말 그대로
"거룩한 부르심"(聖召)을 기억하고 경축하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받았습니다.
서약을 통하여 "수도자"로 불림받았고
서품을 통하여 "사제"로 불림받았습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에 어떻게 화답해야 할까요.
그 모범은 착한 목자이신 주님이 보여주셨지요.
자신이 돌보도록 맡겨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양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 여러분이 가장 착한 목자를 닮으셨군요.
수도자, 성직자들은
이 성소주일의 주인공인듯 하지만
그 성소를 오히려 잘 못 살고 있기에
그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 주라고 하는가 봅니다.
오늘
여러분이 알고 있는 수도자, 성직자 한분한분을 떠올려 보시고
그들을 위해 주모경 한번만 바쳐주세요.
저를 위해서도... 고맙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시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양입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 놓습니다. 스스로 내놓는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성소(聖召)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르심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자녀에로의 부름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소’ 하면 성직자나 수도자의 부름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성직자, 수도자 이전에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이전에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기 부름 받은 대로 그 부름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고 결혼에로 부름 받은 사람은 혼인 안에서 가정을 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소는 더 높고 낮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양들을 알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이웃을 위한 희생, 봉사에 한 몫을 다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부름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양도 목자를 알게 되고 또 그의 음성에 기쁘게 달려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반가워야지 부담스러우면 안 되겠습니다. 부담스러우면 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왕이면 반가운 목소리, 기다려지는 음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만큼, 나도 주님을 알기에 노력해야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모르면 그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알고 서로의 음성에 귀 기울여 주는 넉넉함이 그 구성원임을 확인해 줍니다. 한 주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위한 희생 봉헌의 삶을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영적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느니만큼 특별성소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누가 신학교 입학의 동기를 물으면 ‘오기(傲氣)로 갔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께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갈까?” 하고 던져놓은 것이 어머니에게는 큰 고민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저에게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서 친구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뜸 “너 신학교 가야 되겠니? 신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께 효도 해야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 어머니 하고 제 어머니하고 그러셨답니다.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실은 그 여자 친구보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어째든 그 말씀을 듣고 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신학교 갈까?’가 아니라 “어머니, 저 신학교 가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가 시작되어 “신학교 가면 학비는 물론 용돈도 주지 않을 것이고 너와 나는 끝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서 “그래도 갑니다.” 하고 버텼습니다. 그때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바로 손위 누나가 공무원 이었는데 학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제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때 누나가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은 아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였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원서를 준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추천서를 써 주실까? 실은 본당을 떠나 공부하였기 때문에 신부님을 잘 몰랐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그런 가운데 시골 공소를 방문하신 테오필라 수녀님께서 어머님께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힘들게 하지 말고 기쁘게 보내라” 이 말씀에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할 때는 학비도 살림살이도 모든 것을 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여자에게 전화만 오면 걱정하시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나 깨나 걱정이십니다. 이놈이 끝까지 잘 살아야 할 텐데….그러면서 지금도 매일 기도하십니다. 가끔 집에 들를 때가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어머니께서 기도하시면서 꼬박 꼬박 졸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묵주기도 한번을 몇 시간을 걸려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도 나오고…… 그냥 주무시라고 해도 상관하지 말래요. 당신이 할 것은 다해야 한답니다. 졸음을 지적하니 자존심이 상하셨나 봅니다. 그래도 이런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여전히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자동차 옆자리에 여자 신자 분이 앉으신 것을 보고는 ‘보기 좋지 않다’. ‘뒤를 돌아다 보지마라’고 편지를 쓰셨습니다. 미국 교포사목 중에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공부할 때 용돈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프고, 신학교 간다 할 때 반대 한 것이 안타깝고 면목이 없다’고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신부님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다. 앞날을 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까 어려움을 잘 견뎌라. 어미 생각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쨋든 하느님의 부르심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서 잘 부추겨 줘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오기가 생기도록 해 주어야 하고요. 사실 ‘제가 신학교 갈까?’ 하고 얘기한 것도 시골 공소 회장님이 “너는 신부가 됐으면 좋겠다.” 는 말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시골 공소에서 어울리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시집가고 하나는 수녀가 되고 둘은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한마디 말이 귀한 열매가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답은 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부르시고 나의 협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젊은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참된 목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는 응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이해타산으로 썩어가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희생으로 헌신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는 성소자발굴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물질적인 후원에도 마음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은 항상 제일 좋은 것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도구가 될 사제나 수도자도 자식 중에 제일 나은 자녀를 선택해 주시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성직자, 수도자의 길이 성스럽고 존경스럽다고 하면서도 자녀를 봉헌하시라고 하면 얼굴색이 확 변하는 분도 계십니다. 성직자, 수도자가 좋긴 좋은데 내 자식은 말고 다른 자식 중에서 나오길 바랍니다. 그런 생각을 거두시고 내 가정에서 성직자, 수도자가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하길 희망합니다. 성소는 본인과 그 가정, 이웃에게도 하느님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더 많은 젊은이가 하느님의 선물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받아들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베네딕도16세 교황님께서는 "성소는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며, 우리는 이 하느님 사랑에 삶을 열어젖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온전한 자기 헌신을 할 때 성소가 자랄 수 있다."하시며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을 열심히 읽고, 성찬례에 자주 참례할 때 우리는 이웃안에서 주님이신 그리스도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시며 말씀에 대한 사랑과 미사참례를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가정은 하느님 나라에 봉헌된 생활을 위한 성소의 일차적이고 가장 훌륭한 못자리"(가정공동쳬 50항)라고 말씀하시며 "젊은이들이 가정 안에서 사제직과 봉헌생활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모두가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소, 거룩한부름의 주체요, 협력자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모든 성소의 모범이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주님의 부르심에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대답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이끄십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커다란 용기로 마리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려놓으시고 당신 삶의 계획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 마리아께로 향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마련하신 계획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며 서둘러 길을 떠나 다른 이들을 찾아 가려는 바람을 키웁시다(루카 1,39 참조).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 모두를 보호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간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