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9-17)
베드로 사도는 자발적으로 이방인들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알려 주시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그는 환시를 보고는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마 사람 코르넬리우스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내리는 것을 보고 그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다.(사도행전10,25-26.34-35.44-48)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내어 주심으로써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안다.(요한 1서 4,7-10)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킨다면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요한 15,9-17)
시편 98(97),1.2-3ㄱㄴ.3ㄷㄹ-4(◎ 2 참조)
◎ 주님은 당신 구원을 민족들의 눈앞에 드러내셨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정성을 다해 오랜 시간 공들여 작지 않은 선물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면 왠지 섭섭한 마음도 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겠지요. 또한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 값진 선물을 하게 되면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을 하게 되면, 그 선물에 자기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리도록 고맙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실 때 펄쩍 뛰던 베드로를 왜 사탄이라고까지 꾸짖으셨는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을 뜻하는 그리스 말 ‘둘로스’는, 사실 성경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용어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이 주님의 종으로 불린 것처럼 오히려 종은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칭호이기도 합니다. 동방이나 로마 제국에서도 종은 사적 공간인 임금의 침전까지도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로 그들과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보다도 더 가까운 당신의 벗,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친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친구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에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간이나 신장 이식 수술이 필요한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하여 자녀가 자기 장기의 일부를 기쁜 마음으로 내놓는다고 할 때, 부모님이 자녀의 애틋한 사랑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듯이, 예수님의 친구, 벗인 우리는 친구인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우리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이미 요한복음 13장에 나왔었던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말씀에서 "알게 될 것이다."는 사실상 "알게 하여라."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와 "사랑 실천을 통해서 내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여라."입니다. 여기서 '제자' 라는 말은 사도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만일에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순교'를 통해서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해도, 만일에 하느님과 예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순교'는 무의미한 죽음이 될 뿐입니다.
날마다 미사 참례를 하고, 기도를 하고, 영성체를 함으로써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해도, 만일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그냥 빈껍데기일 뿐이고, 그것으로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세례 증명서를 제시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 증명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종이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예언도, 믿음도, 희생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1코린 13,1-3).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이 말은 꼭 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베푸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우리는 서로(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랑으로' 공동체를(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함께, 한 몸처럼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서로' 라는 말이 하나의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입장에서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할 수 없는 말입니다. '사랑'은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할 테니까 너도 똑같이 나를 사랑하여라." 라고 요구한다면, 또는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라고 비난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말이 됩니다. 이 말에는 사랑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네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가 진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나를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나를 사랑하여라."와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어떻게 다를까? 단순히 표현의 차이일까?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여라."는 듣는 쪽에서는 '강요'로 들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강요'가 아니라 "내 사랑을 받아들여라." 라는 호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 쪽에서는 그 모든 것들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하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신앙인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주는 사랑 안에 머물러라." 라고 호소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웃이 우리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변화되고, 그래서 그 사람도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은 그쪽에서 스스로 실행할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일, 그것뿐입니다.
여기서 '계명'('명령')이라는 말도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명과 명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이 말은, 뜻으로는 '당부', 또는 '권고'에 가깝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물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 사람에게 "살고 싶다면 내 손을 잡아라." 라고 명령하듯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것도 사랑이고, 명령하듯이 말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 말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강제 명령으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인의 사랑 실천은, 싫든 좋든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또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호소, 권고, 당부를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스스로 '기쁨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정말로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싫은 마음을 누르고 좋은 마음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신앙인은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미사 전례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제가 전부 헤아려 보았더니 33번이나 나왔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이수일과 심순애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이 도령과 춘향이의 사랑이 아닙니다. 로미오와 쥴리엣의 사랑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요? 자 이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사랑의 원조, 사랑의 모범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 사랑의 특징은 크게 다섯 가지 입니다.
첫째, 죄인들을 품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루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너의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넘치도록 말씀하십니다. 제가 세검정 본당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여의도 차량 질주 사고로 손자를 잃어버린 할머니께서는 감옥으로 찾아가 범인을 용서하였습니다. 가족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범인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둘째, 겸손하고 무상으로 행해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시고, 조건을 달지 않고,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제가 열병에 걸렸을 때, 어머니의 사랑은 지극 정성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힘 때문에 제가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수난과 고통 중에 행해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음의 강을 건너셨습니다. 예전에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자매님들을 모두 구하고, 숨을 거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죽어가는 형제를 위해서 자신의 신장을 나누어 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형제가 나중에야 알았을 때, 그분이 바로 신부님이셨다고 합니다.
넷째, 사람들을 무조건 믿고 끝까지 신뢰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어도, 끝까지 믿고 사랑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갔어도,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도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어렵지만,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심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의심하기 때문에 내 마음의 평화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다섯째, 하느님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죽기까지 아프리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명동에는 길거리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음식을 팔기 위해서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우리의 열정이 그분들 보다 못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런 사랑은 어쩌면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요한 15,15)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나요?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
임금님
스승 ......
그런가요?
다 맞지요.
그런데 그것이 다 맞을려면
예수님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느껴져야 한다네요.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친구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어때요?
비슷한 느낌인가요?
아니면 달라도 너무 다른가요?
오늘은 내가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고
내 속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그 친구에게 참으로 고맙다고 인사합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참으로 고맙다고...
친구야 고맙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제 친한 친구가 되어주셔서...~~^^
오상선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