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요한 18,1-19,42)

2015. 4. 3. 오전 7: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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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3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요한 18,1-19,42)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이어지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한다. 본디 이날의 전례는 말씀 전례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들어와 오늘과 같은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
오늘은 금육과 단식을 함께 지킨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가장 비참한 고통과 죽음을 겪으시는 이 순간에, 그분께서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남김없이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의 순종을 깊이 묵상하며 전례에 참여합시다.

[주님 수난 예식]
1. 이날과 다음 날에는 오랜 관습에 따라 교회에서 모든 성사를 거행하지 않는다.
2. 제대는 십자가도, 촛대도, 제대포도 없이 벗겨 둔다.
3. 사목의 이유로 좀 더 늦게 할 수도 있지만 오후 3시쯤에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한다. 이 예식은 말씀 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날 영성체는 예식 중에만 하나, 병자 영성체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다.
4. 사제와 부제들은 미사 때처럼 붉은색 제의를 갖추어 입고 제단 앞으로 나가 경의를 표한 다음,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는다. 모두 잠시 침묵 가운데에 기도한다.
5. 그다음에 사제는 복사들과 함께 주례석으로 가서 손을 모으고 교우들을 향하여 아래의 기도를 바친다.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사람들은 멸시와 고통과 죽임을 당하는 주님의 종을 보며 그가 하느님께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그 종은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진 것이었다. 주님의 종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는다. (제1독서이사야서 52,13─53,12)   히브리서는 예수님에 대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위대한 대사제시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시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제2독서히브리서 4,14-16; 5,7-9)     요한 복음의 수난기는 예수님께서 임금이시며 구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임금으로 현양되신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분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의 임금이 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요한 18,1─19,42).


시편 31(30),2와 6.12-13.15-16.17과 25(◎ 루카 23,46)
 ◎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의로움으로 저를 구하소서.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
○ 모든 원수들 때문에 저는 조롱거리가 되고, 이웃들을 소스라치게 하나이다. 아는 이들도 저를 무서워하고, 길에서 보는 이마다 저를 피해 가나이다. 저는 죽은 사람처럼 마음에서 잊히고, 깨진 그릇처럼 되었나이다. ◎
○ 주님, 저는 당신만 믿고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 운명 당신 손에 달렸으니,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라, 마음을 굳게 가져라. ◎

십자가 고난(5)  십자가 고난(6)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넘겨받았다. 17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18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을 가운데로 하여 이쪽저쪽에 하나씩 못 박았다. 19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쓰여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그 명패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쓰여 있었다. 21 그래서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말하였다. ⊙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 하고 저자가 말하였다고 쓰시오.” ○ 22 빌라도가 대답하였다. ●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 ○ 23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몫씩 차지하였다. 속옷도 가져갔는데 그것은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24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 차지가 될지 제비를 뽑자.” ○ “그들이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래서 군사들이 그렇게 하였다.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말씀하셨다.  + “목마르다.” ○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 무릎을 꿇고 잠시 묵상>○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19,16-37)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성화 모음 1

 

<십자가>      송영진 모세 신부

성주간 전례를 거행할 때마다 전례가 연극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물론 성주간 전례에 연극적인 요소가 많긴 합니다. 그래도 그것보다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전체 과정과 결과를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할 수도 없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실 때 부활도 예고하셨습니다. 부활하실 것을 아시면서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이 되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연기를 하신 것인가? 그 일의 전체 과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각본대로 이루어진 일이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1) 예수님은 꼭 그렇게 죽으셔야만 했는가? 체포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또 루카복음서 저자는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예수님의 기도와 고뇌를 보면, 십자가는 예수님의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수난은 구원 사업의 수많은 방식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렇게 해야만 했다."는 말은 하느님께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의 과정과 결과일 뿐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하느님께서 무엇을 생각하셨는지는 모릅니다.

인간들은 메시아를 대하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최악의 것을,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이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죽였습니다. 만일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다면, 구원 사업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죽음이었는데, 사실, 일이 왜 꼭 그런 식으로 되어야만 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빠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그 일은 '신비', 즉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방해해도, 하느님은 결국에는 당신의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방해하는 일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 '악'에서 '부활'이라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2)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가 신앙생활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디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이고, 그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그런데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과 시련 자체가 십자가가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견디는 일, 즉 '인내'가 십자가입니다. 고난과 시련 자체는 '악'입니다.

박해와 고난과 시련을 피하는 것이 선을 이루는 일이라면, 또 피할 수 있다면, 피하면 됩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이 말씀은 비겁하게 달아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테파노 순교 후에 교회가 큰 박해를 받게 되었을 때, 신자들은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서 흩어졌습니다(사도 8,1).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박해를 피해서 떠나는 것도 참고 견디는 일에 속합니다.

선으로 악을 물리칠 수 있다면 물리쳐야 합니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로마 12,21.공동번역)."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악에게 굴복하시지 않았고, 선으로써(용서하심으로써) 악을 이겨내셨습니다(루카 23,34). (참고 견디는 것과 굴복하는 것은 다릅니다.)

3)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십자가를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무죄한 어린이들(마태 2,16),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졌던 키레네 사람 시몬(루카 23,26), 세월호 희생자들, 5.18 희생자들... 그들은 모두 세상의(인간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억울하게 죽었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묵시 21,4). 십자가라는 것을 알고 당했든지 모르고 당했든지 간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나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겪으셨던 일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부활절이 되면,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분"으로 선포될 것입니다. 성금요일의 상황에서는 그것과 반대로, "예수님은 나중에 부활하시겠지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신 분"으로 선포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전체 과정과 결과를 잘 알고 있다고 해서, 성금요일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인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성화 모음 2

 수난기에서는 ‘임금’이라는 주제가 되풀이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십니다. 당신께서 임금이심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머리에 쓰신 관과 자주색 옷 또한 임금의 표지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임금이라 자처하여 황제에게 대항했다고 주장합니다. 빌라도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여러분의 임금”이라 말합니다. 그들 모두가 역설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임금으로 인정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예수님의 명패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임금이라고 주장하셨다고 써야 한다는 수석 사제들의 말을 거절하며 끝까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명패를 달게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볼 수 있도록 세 가지 언어로 같은 내용을 쓰게 합니다.
예수님은 임금이셨습니다. 부활하신 다음 비로소 임금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수난의 그 순간에 이미 임금이셨습니다. 사랑으로 생명을 내어 주시고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이 ‘다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15,13 참조).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분 나라에서는, 다른 이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다른 이들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되어 그들의 상처를 낫게 하는 주님의 종이 임금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외아들을 살려 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러운 외아드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도록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이 순간, 하느님의 이 침묵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성화 모음 3

 

 ♡ 예수님의 죽음은 삶의 결과입니다.      반영억라파엘 신부님

오늘은 깊은 침묵 속에 머무릅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모두를 내 놓으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습니다. 당신의 모두를 내어 놓고 아버지의 뜻 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요한15,13-15) 우리를 위한 사랑이 넘쳐났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못하고 권력에 맛들인 이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높이 달려야 했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시고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고발한 사람들에게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8) 하시며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요한13,5) 겸손과 봉사, 참된 사랑의 본을 보여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5)하시며 사랑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가운데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하고 간청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은 선을 낳고 악은 또 다른 악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차마 십자가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오직 사랑밖에 없기에 기꺼이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결국 일상의 삶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삶이었기에 그 삶의 결과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고통이 아니라 그 큰 사랑을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큰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곧 드러내시길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고백 했듯이 우리도 사랑 때문에 죽게 하시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이세상의 삶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삶의 결과이듯 우리의 죽음도 사랑의 삶의 결과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하고 콜로사이 공동체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처럼 사랑을 증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경배를 통하여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여러분은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성녀 쥴리 빌리아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목요일 성유축성 미사 강론에서 장 가브리엘 주교님께서는 교황님께서 한국사제에게 당부하신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1,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지 말고 대 사제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가난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라. 2.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사제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봉사하는 사제가 되어라. 사제는 평신도와 교회에 봉사해야 한다. 사제는 겸손한 봉사자이다. 3,고백성사를 잘 집전하는 사제가 되어라,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 어떤 죄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다. 자비로 감싸주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라. 사제는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잘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십자가 고난(5)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 19,30)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안계십니다.
늘 함께 계시던 그분이 안계신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늘 그리하셨듯이
언제나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었지요.

그러니 그분은
다시 살아나실 겁니다.
분명 그리하실 겁니다.
여태까지와 다른 방식일지는 몰라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그 약속은 저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성체의 모습으로
매일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몸속 저 깊은 곳까지 오셔서 머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아도 늘 함께 있음을 압니다.

그분이 오늘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슬프진 않습니다.
"다 이루시고" 가셨으니 여한도 없습니다.

이제 내 몫이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물리적으로 내곁을 떠났지만
영적으로는 늘 내 마음 안에살아있음을 잘 압니다.
이제 나도 남은 여생 잘 살아 내몫을 "다 이루는" 그 일만 남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만날 것입니다.
기쁨에 흥겨워 얼싸안고 춤추게 될 것입니다.
암요. 꼭 그리 될 겁니다. 아멘.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인영균끌레멘스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죽음의 경계선에 선 한 사람을 모두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려있습니다. 하느님이 죽으셨습니다. 죽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고통의 철저함 속에서 비참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지막 자리인 죽음마저 당신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철저한 하나됨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죽음의 의미를 말해줍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 

십자가를 차마 쳐다볼 용기도 면목도 없습니다. 숨을 죽이고 가슴만 칠 뿐입니다. 어떤 말도 필요없습니다. 눈물마저도 사치스럽습니다.

오늘은 나의 탓, 우리의 탓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희생임을 마음에 깊이 각인합니다. 사랑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에 새겨집니다.

어제에서 오늘로 넘어오는 시간, 겟세마니에서 주님이 핏땀을 흘리며 고뇌하던 그 시간, 수난 제대에 모셔진 주님 앞에서 내 입에서는 세리의 기도만 흘러나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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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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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 대축일]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요한 20,1-9)15.04.05조회 57<부활 성야>나자렛 예수님은 되살아나셨다 (마르 16,1-7)15.04.04조회 53[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요한 18,1-19,42)15.04.03조회 114[주님 만찬 성목요일]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요한 13,1-15)15.04.02조회 60<주님 수난 성지 주일>너의 임금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요한 12, 13-19)15.03.29조회 54[나해사순 제5주일] 한알의 밀알 (요한 12,20-33)15.03.22조회 55[나해 사순 제4주일] 하느님 사랑.(요한 3,14-21)15.03.15조회 85[사순 제3주일] 성전정화 (요한 2,13-25).15.03.08조회 62<사순 제2주일> 거룩한 변모사건 .(마르 9,2-10)15.02.28조회 55[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마르코복음 1,12-15).15.02.22조회 106[연중 제6주일] 나병환자 치유 (마르 1,40-45).15.02.13조회 104[연중 제5주일]+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 마르코 1,29-39)15.02.08조회 120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22-40) 주님께 바쳤다.15.02.02조회 55연중 제4주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코 1,21-28)15.02.01조회 115밀과 가라지 (마태 13:24-43) 故이계광 세례요한신부님15.01.30조회 55연중 제3주일]부르심과 응답 ( 마르 1,14-20)15.01.25조회 52연중제2주일: “와서 보아라.” .(요한 1,35-42)15.01.18조회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