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16주일(농민주일)
밀과 가라지 (마태 13:24-43) 故이계광 세례요한신부님
묵시3:20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마태 13:24-43중에서)
하늘나라! 하늘나라의 반대는 땅의 나라이겠지요?
먹고 입고 사느라 바빠서 그것에 골몰하고 그것만을 찾다보니 의리니, 체면이니 더구나 정직이나 성실, 봉사나 사랑 따위의 말이나 생각은 아예 잊은 지가 오래 됐습니다. 눈감으면 코 베가는 세상이라더니,
아니 요새는 눈 뻔히 뜨고도 코뿐만 아니라 온통 껍데기 전체를 볏겨 가는 그 땅의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매일같이 말을 바꾸고 그리고도 또 새로운 성명, 새로운 발표를 거침없이 내보내는 정치계와 정사 당국! 신문. 잡지. 라디오. TV. 큰 글자 큰소리 뒤에는 으레 반듯이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소리와 또 다른 글자들! 눈여겨 조심조심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아야만 하는 이 이중의 나라! 이 땅의 나라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아니 이 땅의 나라 속에 하늘나라를 우리는 심어야 하고 일으켜야 하며 키우고 지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진실과 정의가 활개를 치고 믿음과 평화가 넘쳐흐르는 나라를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어떤 사람! 아마도 그는 좋은 사람이겠지요. 스스로 거짓을 미워하고 정직과 진실을 사랑하고 착하며 이 세상에, 이 땅의 나라에 그 것을, 그 정직과 진실을 심어주고 퍼뜨리며 자라나기를 원하는 그 사람들 말입니다.
확실히 오늘의 이 나라 이 사회에는 이 어떤 사람이, 이러한 정치인, 이러한 대통령, 이러한 공무원이 아주 절실하게 필요하며 또 요구 됩니다.
좋은 씨! 눈에 보이고 밖에 드러난 현실로 나타난 모든 좋은 결과와 좋은 성과들!
그러나 그 시작은, 그 씨앗은 한 사람의, 한 사회의 좋은 마음으로부터 바른 판단과 결정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요 시작인 것입니다.
그 출발과 시작이 참되고 옳은 것이었기에 참되고 옳은 결과와 성과를 내게 한 것이요 만들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참되고 옳은 결과와 성과를 내고 또 만들기까지에는 계속 바르고 옳은 그 마음을, 바르고 옳은 그 판단과 결정을 지켜주고 밀어주며 키워주는 또 다른 옳고 바른 힘과 노력과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절대로 이 지상의 역사는 이 세상의 만사는 하루아침에 별안간 시작된 것도 또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고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결과와 성과 밖에 드러난 현실만을 보고 따지며 그 시작과 씨앗을, 또 그 씨앗이 열매를 맺기까지의 그 노력과 그 과정을 생각하지 않으며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우선 씨앗을 먼저 알아야 하며 따져야 하고 선별해야 합니다.
좋지 않은 씨앗, 정직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마음으로부터는,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판단과 결정으로 부터는 절대로 좋은 결과와 성과, 좋은 세상과 좋은 시대를, 좋은 정치와 좋은 나라를 기대할 수 없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원수와 가라지! 누가 원수요 가라지겠습니까? 먼저 원수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속에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탓을 남으로부터 찾으려고만 합니까? 적어도 밖으로부터의 원수를 막지 못한 탓은 나에게, 나 속에 잇는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결합한 혼혈아인 우리 사람들입니다. 가장 가까운 동지요 또 가장 무서운 원수는 바로 내 육신 내 몸뚱이 나 자신입니다.
가라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소중이 여기며 또 조심하라는 이 자중 자애의 정신과 마음가짐은 자칫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만을 중히 여기는 그릇된 자존심으로, 또 자기만을 내 세우는 자기 허영으로 변하고 옮아가기 십상입니다.
밀씨와 가라지씨의 구별과 선별은 그래서 시작 때에는 아주 비슷하여 혼동하기가 쉬우나, 크고 자라는 동안에, 아니 사람들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 방심하고 오만하고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동안에 이제 그 정체가, 본 모습이 하나하나씩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가라지 역시 원수와 마찬가지로 밖에서 온 것만이 아니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속에 위장된 말씨로 숨겨져 있었고 더불어 같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잠을 깨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느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하늘나라 백성으로 하늘나라의 일꾼으로 살고 있는지 알아보아야겠습니다.
과연 지금도 나에게는 정직과 성실이 살아 있는지, 과연 지금도 나는 가라지가 아닌 밀씨로 남아 있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과 자성은 비단 오늘의 이 나라와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인들과 사회 지도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먼저 우리 성도(聖徒)들 각자가 첫째 그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그리고 자기 책임과 자기 본분 아래 있는 여러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직장과 직책 속에서 반드시 그 해답을 찾아야 하고 그 시정과 개혁의 길과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사람들의 이러한 나약함과 결함을 너무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선의와 작은 시작을 끝까지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을 쉽게 단죄하시거나 쉽게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끝까지 이해하시고 용서 하시며 오래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끝내 돌아오지 않는 자에게는 자기가 저지른,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 결과에 대해, 아픔과 혼란에 대해 심판받게 하실 것이요 보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절대로 저 세상에 가서가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서, 죽어서 역사에서가 아니라 살아서 바로 이 세대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들을, 그 살아있는 심판을 불과 얼마 안되는 지난 역사 속에서 계속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또 착한 뜻에서 또한 좋은 목적을 위해 세워지고 시작한 교회와 사회의 많은 사업과 많은 단체들이 중도에 스스로 자멸을 하고 불미스러운 결과만을 남겨 놓게 되는 대부분의 이유와 원인들이 바로 이 도둑으로 변신한 그 어떤 사람들의, 이 가라지씨로 변해 버린 밀씨들의 자만과 허영, 욕심과 게으름 때문 이었던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 버려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 들이게 하겠다.” 아멘.
故 이계광 세례자요한 신부님의 강론집 중에서
이계광 세례자요한 신부님께서 2011년12월 26일 오후 20시 33분에 선종.
향년 91세 빈소:명동성당 지하 소성당 12월 28일 용인성직자묘지안장

|
|
| ▲ 가라지 비유는 누구에게나 아직 회개의 시간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준비한 이에게 종말은 두려움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이 될 것이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
최광희 신부 가톨릭 청년성서모임 담당 마태 13,24-30.
36-43
마태오 복음에만 언급되고 있는 가라지의 비유는, 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비유 부분과 비유의 참뜻을 설명하기
위한 해설 부분, 이렇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의 군중들에게 먼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며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는 ‘인내’를 강조하신다. 두 번째 부분인 그 해설은 비유를 설명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세상 마지막 날 즉,
종말에 대한 설명을 그 중심 메시지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로 가라지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그
당시 청중들에게 잘 알려졌던 은유들이나 구약성경의 표징 또는 상징들을 잘 활용해서 말씀하신다. 이러한 표징들이 이 비유에서 매우 잘 드러나는데,
이는 우화(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설명될 수 있다.
가라지 비유에 담긴 다양한 의미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우화적
해석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일곱 가지 범주가 차례차례 제시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 명확하고도 충실하게 제시되고
있다.
비유의 해설에 나타난 이 일곱 가지 범주를 살펴보면,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 본인 자신을 드러내며, 밭은 세상을,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을 의미한다.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을,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를,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을,
일꾼들은 천사들을 나타내고 있다. 즉,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현실적인 삶의 모습들과 하느님 나라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가라지의 비유는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선한 행위를 드러내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 즉,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 안에서도 시작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하느님
나라에는 기이한 상황 역시 존재한다. 밤에 가라지를 뿌리는 원수가 등장하는 것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행위를 선한 행위로 또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로 생각해 본다면, 밤에 나타난 원수는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 역시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세상 안의
하느님 나라이기에,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이기에 악한 자녀들도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피나 독보리라고도
불리는 가라지는 초기 성장 단계에서는 밀과 매우 유사하기에 보통은 끊임없이 가라지를 뽑아내는 것이 당대의 일반적인 농사법이었다. 이에 종들은
관습대로 열의를 가지고 ‘가라지를 걷어내겠다’고 주인의 허락을 청한다.
사실 밀보다 가라지의 뿌리가 더 강하기에 실제로 가라지를 뽑아낼 때에는
어린 밀이 함께 뽑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 사실이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고, 여전히 가라지들은
뽑아내야 할 대상이었다.
기쁨을 준비하는 시기
메시아를 고대하며 기다리던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합당한 준비로 순수한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 공동체에 합당하지 못한 죄인들을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비난하는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표적 집단들로는 바리사이들, 쿰란 공동체를 비롯한 엄격주의자들, 열성당원들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열성당원들은 당장에 밀(유다인)과 가라지(로마인)를 구별하여 가라지를 뽑아내려고(로마인들을 쫓아냄) 조급해 했으며,
바리사이들의 경우에도 엄격한 율법에 의해 죄인들과 의인들을 구별해 내는 일에 자주 집착하고 있었다. 엄격한 율법을 충실히 지킬 수 있는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선인으로 여기며, 이를 지킬 수 없는 많은 이들은 죄인으로 단죄하고 있었다.
여기에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을 심판하지도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예수님은 자연히 비판의 대상이 됐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에서 당장의 심판보다는 둘의 차이가 명확하게 구별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야 함을 말씀하신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이 다치게 되는 상황을 염려하며 인내의 필요성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계신 것이다.
더불어
추수를 할 사람들은 종들이 아니라 추수꾼들이 따로 있음을 언급하시며, 우리 자신이 심판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바로 교회 안의 악인들을
심판하고 구별할 사람은 공동체 내의 의인이나 선한 자가 아니라 마지막 심판 때에 임하실 분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급한 구별이나 단죄, 심판
금지의 말씀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밀에게도 가라지에게도 추수 때까지의 시간은 회개할 가능성이 주어진 시간이며 모두가 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때로 공동체 안에서 악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이는 좋은 밀로 성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초대이기도 하다.
가라지의 비유와 그 해설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된 이들임을 설명하며, 이제 종말의 심판은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준비하는 시기요, 그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대된 사랑의 시간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가라지비유 마태복음 13: 24-30 장로교
우리나라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은 404장, 405장, 102장 인데 그 가운데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라는 찬송을 존 뉴톤이라는 목사님이 지으셨습니다.
존 뉴톤은 11살 때부터 아버지가 소유한 노예선에서 선원생활을 했는데, 그 배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미국의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기는 노예 선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그 자신이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서 수많은 노예들을 잡아다가 팔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 사실을 깊이 회개하였고, 영적인 체험을 한 후에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헌신했습니다.
그는 결국 영국 성공회의 사제로 안수를 받아서 평생을 교회를 섬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존 뉴톤 목사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이런 이야기하기를 “나는 하늘에 가게되면 세 가지 사실에 크게 놀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늘나라에 올 줄 알았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놀라고, 또 하나는 하늘나라에 오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와 있는 것 때문에 놀라고, 세 번째로는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와 있는 것 때문에 놀라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말씀이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소위 <가라지 비유>라는 이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천국의 씨들이 다 되어서 마지막 추수 때에 알곡으로 다 추수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들이 있어서 알곡을 괴롭히고, 알곡의 신앙을 방해하고, 알곡을 낙심케 하지만 이런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승리하셔서 천국에서 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주인이 종들을 시켜서 자기 밭에 좋은 씨들을 뿌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싹이 나고 자라서 결실할 때가 되자 가라지가 여기저기 보이는 것입니다.
당황한 종들이 주인에게 달려가서 "주인님이 주신 좋은 씨를 밭에 뿌렸는데 가라지가 났습니다. 어떻게 가라지가 나왔습니까? "
그러자 주인이 대답합니다. "아! 원수 마귀가 그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다시 말하기를 "주인님, 우리가 가서 가라지를 뽑을까요?" 하자
주인은 "아니다. 그냥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된다. 둘 다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두어라. 추수 때에 가라지는 묶어서 풀무불에 던져넣고 곡식은 모아서 내 곳간 안에 둘 것이다. 그때 가라지는 풀무불 속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고 곡식인 의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같이 빛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37절에서 42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여기보면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 예수님이십니다.
좋은 씨란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말씀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의인,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밭은 세상이요, 교회입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가라지를 심은 자는 하나님의 원수요, 마귀입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입니다. 추수꾼은 천사들입니다. 가라지를 묶어서 불에 사르는 것은 마지막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살펴보면 종들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주인의 답변으로 이 비유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종들이 질문하는 질문 뿐만 아니라 역사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 하는 질문 중의 하나도 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 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왜 곡식 밭에, 좋은 밭에 가라지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의 교회에 가라지가 납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선하고 아름다운 일만 있어야 하는데 왜 악하고 더러운 일이 공존합니까? 왜 하나님의 교회에 남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 많고, 교회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있을까요?
천국의 모형이라는 교회에 왜 분쟁이 있습니까? 왜 하나님의 교회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잘 믿는 척 하는 사람들이 왜 남을 실족케 합니까?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세상입니까? 이것이 종들이 물었던 질문이고 또한 우리들의 질문입니다. 모든 오고 간 성도들의 질문이고, 믿음 안에서 진실하게 살려고 한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천국의 모형인 지상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자녀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밭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좋은 씨>라고 했습니다. 38절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43절에는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또 43절에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같이 빛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30절에는 <곳간에 들어갈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런 자들이 모여서 천국을 사모하고 천국을 준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스러워야 합니다.
거룩해야 됩니다. 깨끗해야 됩니다. 의로워야 됩니다. 질서가 있어야 됩니다. 사랑만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실제로 그렇습니까? 정말 교회가 언제나 성스럽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의롭고, 질서있고,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까?
교회는 그런 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자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 마귀의 자녀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곡식에 상처를 줍니다. 곡식을 실족케 합니다. 곡식들을 아프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수 마귀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운데 마귀의 자녀를 뿌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 가운데 성도 아닌 자를 마귀가 몰래 끼워 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라지는 곡식과 아주 비슷합니다. 못자리를 보면 일반 사람들은 그것이 모인지, 피인지를 잘 모릅니다.
가라지라는 말은 본래는 독벌이라는 말인데 일본 번역에는 동맥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자랄 때는 가라지인 줄 잘 모릅니다.
언제쯤 되면 알 수 있는가 하면 이삭이 팰 때, 곡식을 거둘 때가 되면 아! 이것이 가라지구나! 하고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추수 때가 될 때까지는 곡식인지, 가라지인지 전혀 알지 못하도록 사탄이 교회 안에다 가라지를 심어두어서 가라지를 통해서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교회의 사랑이 식어지게 만들고, 분별없는 교인들이 볼 때에는 가라지가 교인인 줄 알고 교회가 왜 이렇느냐고 실망하고 낙심하게 하고, 사회 사람들이 볼 때에도 교회가 왜 이렇느냐고 비판하게 합니다.
악한 사탄이 자기들의 자녀를 곡식 가운데 심어서 성도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넘어지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잘못된 활동을 보고 실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의 교회를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왜 이러느냐고 교회를 떠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종자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이 안에는 악한 사탄이 뿌려놓은 가라지가 있음을 인정하게 될 때 실족하지 않고 바른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볼 때마다, 교회에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가라지가 되지 않고 알곡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신앙관리를 잘 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들의 두 번 째 질문은 그러면 가라지를 뽑기를 원합니까?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두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당장 벼락이라도 쳐서 악을 멸하지 않고 그대로 봐주시는가요? 계속 벼락을 치면 가능은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같아 걱정입니다.
또한 바꾸어 생각해 볼 때 선한 일을 하였는데도 당장 복을 안 주신다고 원망을 하면 아마 하나님께서는 조건을 거실 것입니다.
"그래, 네가 선한 일을 하자마자 내가 복을 주겠다. 대신 잘못 악을 행하면 벼락을 치마." 이렇게 나오시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저 복 받는 것 연기해 주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미련하고 둔한 듯이 선하게 살아가노라면 언젠가는 다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서두르고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알곡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을 뽑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마 같은 인간 만 명보다 의인 한 사람 상하는 것을 더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셨습니다.
벼를 심을 때는 돌피가 있고 조를 심을 때는 가라지가 있는데 이것들을 구분하기가 대단히 힘이 듭니다. 자라는 것은 오히려 돌피와 가라지가 더 잘 자랍니다.
자라는 동안의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 하는 방법은 뿌리를 보지 않고는 잘 분별 할 수 없습니다. 벼의 뿌리는 붉은가 하면 돌피의 뿌리는 하얗습니다.
그러니까 가라지를 제거 하려면 뿌리를 뽑아서 보아야 알 수 있고 뿌리를 뽑다 혹 실수하여 알곡을 뽑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열 개를 뽑는다 하더라도 알곡이 하나라도 다쳐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여지는 악인 모두를 그대로 심판해 버리는 동안 선한 사람 하나라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넓고 크신 사랑으로 의인과 악인의 밭에 골고루 비를 내려주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결국은 택한 백성, 구원 얻은 백성이지 가라지 살찌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영양을 빼앗기고 손해를 보는 억울함과 불편이 있지만, 그것을 겪더라도 알곡은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스바와 구스를 내어 주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가장 강대한 나라였던 스바와 구스, 요즘으로 말하면 미국과 같은 나라인데 그런 큰 나라를 포기하면서까지 나 한 사람을 건지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뜨거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곡식이 가라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가라지와 함께 있으면서 성결케 되고, 강하게 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성도는 환난을 통하여서 더 강하여지고 성결케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이 만사형통하게 되는 삶을 원하고 있지만 만약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제목마다 다 이루어져서 삶의 어느 부분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삶을 산다고 하면,
그래도 기도 생활에 열심을 낼까요? 그래도 주일 잘 지킬까요? 그래도 성경 잘 읽고, 그래도 전도를 할까요? 교회에 나아와 봉사 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다 채워지면 처음에는 감사해서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하겠지만 점점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성경 읽지 않고 주일에는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주일성수 안하고 결국에는 믿음 다 팔아버리고 주님을 떠나가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라지라는 고통을 허락하여서 우리를 훈련시켜 어떠한 유혹에도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과 신앙을 굳건하고 더 견고케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양떼를 키울 때도 양들 속에 염소를 몇 마리 넣어 둡니다. 예수님께서 양을 안고 계시는 그림을 보면 양떼들 틈에 새까만 염소가 한 마리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왜 염소를 넣어두는가 하면 염소가 양들 사이를 다니면서 양을 들이받고, 밟고 하다보면 운동도 하지 않고 온기종기 모여있던 양들이 도망다니고 흩어지고 그러다보면 운동이 되어서 양들이 건강해 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인의 아들인데 너무 귀하게 자라서 한 번도 매를 맞아본 적이 없고 때려본 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착하여 주위로부터 칭찬만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보니 말이 말이 아니고 거친 욕지거리와 매 맞는 일이 다반사가 되자 급기야는 인생무상이라 하여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이러한 인생이 있는 줄 몰랐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적당한 욕도 먹고 매도 맞아 보아야 좋은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가시에 찔려보기기도 하고, 누명도 쓰면서 곤욕도 받아 바야 그 속에서 강하게 되고 지혜롭게 되고 또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라지의 사명을 다른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 욕을 하고, 환난을 가져다 주고, 손해를 끼치게 하고, 배반하고, 가시처럼 성도를 찔러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갖 고난을 통하여 더 순수해지고 더 굳세어지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주님을 닮아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픔만큼 성숙해 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선과 악이 공존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악 때문에 악을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고 선 때문에 악을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모두가 알곡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라지를 허용하여 성도를 괴롭히고, 영양을 빼앗아가고, 문제를 일으키도록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곡들을 훈련시키고, 강하게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 우리의 질문은 “영원히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것이냐? 선과 악이, 참과 거짓이 영원히 공존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반드시 하나님의 추수 때가 옵니다. 무작정 두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종말적이기도 하고 현재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현재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정한 시간에, 정한 사람에게, 정한 장소에서, 정한 방법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 종말적 심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는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추수기가 되면 알곡은 고개를 숙이는데, 가라지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이제야 도리가 없습니다. 뿌리가 다른 결과가 여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교만하게 들고 있는 가라지의 빳빳한 고개가 이제는 잘라 버리기에 편리해진 것입니다.
어느 결정적인 시간에 이르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되면 누가 지옥에 가라고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가게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모습이 드러나고 그 열매가 다르기 때문에 이제는 함께 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적인 심판입니다.
가라지의 최후는 어떻게 됩니까? 41절과 42절에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부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런 자들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했고, 그 곳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같은 세상에서 살았지만 추수 때가 되었을 때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위로를 받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43절에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그때에 알곡된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같이 빛날 것이라> 할렐루야!
우리가 가야 할 저 천국은 악이 없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죄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상처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생 복락을 누리며 해와 같이 반짝 반짝 빛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는 우리 주위에 가라지가 있기 때문에 마음 상할 때가 있고,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이제 우리는 서두르지도 마시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우리가 당한 이 처지에서 인내하며 바르게 성장해 나아가야 합니다.
추수할 때 보면 탐스럽고 참 충실한 이삭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조그마한 것이 가엾게 몇 개 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쨌든 가을이 되면 여름 동안에 자란 대로 길가에 마른풀도 열매는 맺습니다. 상처 나고 비틀어진 것이라도 열매는 맺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뜨거운 긴긴 여름날을 충실하게 보내며 자랐다면, 크고 탐스러운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잘못 자랐으면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왕이면 작은 열매 보다는 탐스럽고 충실한 열매를 맺어 주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드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지금 우리가 알곡된 것에 더욱 감사하시고 더 충실한 알곡이 될 수 있도록 날마다 믿음 생활 잘 하다가 마지막 추수 때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