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32주일(루카20,27-38)

2013. 11. 10. 오후 6:58:27

글자

 

2013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
 
제1독서 2마카 7,1-2.9-14 제2독서 2테살 2,16─3,5 복음 루카 20,27-38
 
산 이들의 하느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멈추신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앞에 계실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고 우리도 영원에로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영원한 삶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소중히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천상의 삶,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성경의 인물을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늘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고 옛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쓴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허물에 대해서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도 정말 용서를 받았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죄책감에 묶여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마침표를 찍어 주셨는데도 자꾸 물음표를 던지는 잘못을 또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미래의 약속된 천상이 없기 때문에 지금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듯 살아갑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이기적입니다. 사두가이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누리고 사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조차 없는 훨씬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의 성공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그야말로 너무 짜게 살아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았습니다.
 
오늘 1독서의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이야기는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지상논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은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지상을 넘어 천상의 새 삶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지상은 중간역이고 천상이 종착역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잘 지으려면 지금 수확을 하고서 농토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거름을 주고 밭을 갈아엎으며 다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력이 떨어져 다음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고달프고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농사를 계속하려면 힘들다고 멈출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이 세속적인 삶과는 다르게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하더라도 풍요로운 결실을 희망한다면 해야 합니다. 영적인 거름을 주는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시간을 반드시 챙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지상에서의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살아계시고 나도 영적인 사람으로 항상 그분 앞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집,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새 생명에로 초대하셨고,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의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은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 땅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믿고,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또한 거기에는 축복된 새 삶이 펼쳐질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고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지옥처럼 사는 사람은 내일도 지옥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죽은 분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오늘을 천국으로 사는 사람은 내일도 천국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늘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영원을’ 즐겁게, 희망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  20,27-38


 +조재형 신부+

지난 112일에 용인 천주교 묘지엘 다녀왔습니다. 묘지에는 많은 분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묘는 최근에 세워졌고, 어떤 묘는 오래 되었는지 묘지에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묘지에 계신 모든 분들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사시기를 기도하면서 우리들 또한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또 많은 민족들이 이 지구상에서 있다가 사라져가기도 했고,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다가 지금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민족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배우기도하고, 잘못된 일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억울한 일, 잘못된 일이 많이 있지만 가장 억울하고 잘못된 일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일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벨은 아무 잘못도 없이 형의 질투로 인해서 들판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다윗의 부하인 우리야는 왕의 욕망 때문에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했으며, 경건한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이 단지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 속에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바로 이런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은 결코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이야길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너희가 우리의 목숨을 빼앗는다 하더라도 끝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주실 것이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다.” 다름 아닌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억압을 받을 때, 참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래서 목숨을 잃게 될 때 절망하거나, 권력의 편에 서서 생명을 유지하거나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그들의 억울함을 보시고 위로를 주시며,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리라는 신앙을 가졌고 그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부활은 단지 희망이 아니라 현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품으로 가면 천사처럼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를 보지는 못했지만 세상 속에서 천사와 같은 모습을 보곤 합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달걀은 부화를 하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눈이 있고, 다리가 있고, 날개가 있습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죽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애벌레와 나비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천사처럼 된다는 것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두운 달걀 속에서 껍질을 깨고 밝은 세상을 바라보는 병아리처럼, 우리는 가식과 허위와 위선과 교만의 껍질을 깨고 사랑과 평화와 행복과 기쁨의 날개를 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 천사처럼 된다면 그래서 사랑과 평화를 찾는다면, 행복과 기쁨을 얻는다면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겨울이 되어 들과 산은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대지는 생명을 품고 있어서 봄이 되면 다시금 파란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는 죽은 것처럼 보이고, 죽은 듯이 보이지만, 그래서 어둠이 계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시고, 우리를 기억해 주시고, 우리를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땅이 얼고 겨울의 황량함이 가득하겠지만 따뜻한 봄이 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비록 우리의 삶에 고난과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실패와 좌절이 있더라도 하루 하루의 삶에 충실했으면 합니다.

 

 

 

작은 부활, 큰 부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부활이란 것, 인류 역사 안에서 전무후무한 것이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기에 그게 과연 내게 해당이나 되는 일이겠는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이자 믿을 교리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교의 근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교회의 기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부활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시고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최초로 영원히 풀리지 않았던 숙제였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삶 안에 적용시켜야할 부활 신앙입니다. 그로 인해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홀가분하게 이 세상을 떠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힘든 순간이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했고 분노로 치가 떨렸습니다.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다보니 몸과 마음도 점점 병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게 마음먹고 내가 먼저 뒤로 물러났습니다. 내가 먼저 용서했습니다. 내가 먼저 자세를 낮췄습니다. 한 마디로 내가 죽었습니다. 일종의 작은 죽음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죽기보다 지기 싫어 죽지 않았는데, 내가 죽으니 그때에 내가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여유가 생겼고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일상 안에서도 죽음을 통한 부활이 지속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결정적인 순간에 부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우리네 일상 안에서 부활을 체험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 숨 쉬며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때 우리가 죽어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순간입니다. 누군가와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우울과 낙담, 절망 속을 헤맬 때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져 죄 속에서 방황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만 찾을 때입니다. 그 순간은 어떤 면에서 목숨이 붙어있지만 죽어있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부활신앙이 꼭 필요할 때입니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남을 통해 가능합니다. 죄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설 때 가능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헤아릴 때 가능합니다. 죽기보다 힘든 용서지만 죽을 각오로 내가 먼저 용서할 때 가능합니다.

 

때로 완벽해 보이는 이승의 삶이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이승의 삶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맞이하게 될 또 다른 삶에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한낱 서곡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정과 평화 기쁨이 무척이나 커 보이지만 언젠가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 맞보게 될 영원한 삶, 부활의 삶에 비교하면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자질구레한 우리들의 일상사 안에서도 작은 부활을 맛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 언젠가 또 다른 생을 맞이한 때 다가올 결정적인 부활에서도 제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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