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 20,27-38
지난 11월 2일에 용인 천주교 묘지엘 다녀왔습니다. 묘지에는 많은 분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묘는 최근에 세워졌고, 어떤 묘는 오래 되었는지 묘지에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묘지에 계신 모든 분들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사시기를 기도하면서 우리들 또한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또 많은 민족들이 이 지구상에서 있다가 사라져가기도 했고,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다가 지금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민족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배우기도하고, 잘못된 일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억울한 일, 잘못된 일이 많이 있지만 가장 억울하고 잘못된 일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일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벨은 아무 잘못도 없이 형의 질투로 인해서 들판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다윗의 부하인 우리야는 왕의 욕망 때문에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했으며, 경건한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이 단지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 속에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바로 이런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은 결코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이야길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너희가 우리의 목숨을 빼앗는다 하더라도 끝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주실 것이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다.” 다름 아닌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억압을 받을 때, 참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래서 목숨을 잃게 될 때 절망하거나, 권력의 편에 서서 생명을 유지하거나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그들의 억울함을 보시고 위로를 주시며,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리라는 신앙을 가졌고 그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부활은 단지 희망이 아니라 현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품으로 가면 ‘천사’처럼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를 보지는 못했지만 세상 속에서 천사와 같은 모습을 보곤 합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달걀은 부화를 하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눈이 있고, 다리가 있고, 날개가 있습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죽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애벌레와 나비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천사처럼 된다는 것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두운 달걀 속에서 껍질을 깨고 밝은 세상을 바라보는 병아리처럼, 우리는 가식과 허위와 위선과 교만의 껍질을 깨고 사랑과 평화와 행복과 기쁨의 날개를 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 천사처럼 된다면 그래서 사랑과 평화를 찾는다면, 행복과 기쁨을 얻는다면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겨울이 되어 들과 산은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대지는 생명을 품고 있어서 봄이 되면 다시금 파란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는 죽은 것처럼 보이고, 죽은 듯이 보이지만, 그래서 어둠이 계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시고, 우리를 기억해 주시고, 우리를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땅이 얼고 겨울의 황량함이 가득하겠지만 따뜻한 봄이 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비록 우리의 삶에 고난과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실패와 좌절이 있더라도 하루 하루의 삶에 충실했으면 합니다.
작은 부활, 큰 부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부활이란 것, 인류 역사 안에서 전무후무한 것이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기에 그게 과연 내게 해당이나 되는 일이겠는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이자 믿을 교리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교의 근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교회의 기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부활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시고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최초로 영원히 풀리지 않았던 숙제였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삶 안에 적용시켜야할 부활 신앙입니다. 그로 인해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홀가분하게 이 세상을 떠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힘든 순간이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했고 분노로 치가 떨렸습니다.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다보니 몸과 마음도 점점 병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게 마음먹고 내가 먼저 뒤로 물러났습니다. 내가 먼저 용서했습니다. 내가 먼저 자세를 낮췄습니다. 한 마디로 내가 죽었습니다. 일종의 작은 죽음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죽기보다 지기 싫어 죽지 않았는데, 내가 죽으니 그때에 내가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여유가 생겼고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일상 안에서도 죽음을 통한 부활이 지속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결정적인 순간에 부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우리네 일상 안에서 부활을 체험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 숨 쉬며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때 우리가 죽어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순간입니다. 누군가와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우울과 낙담, 절망 속을 헤맬 때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져 죄 속에서 방황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만 찾을 때입니다. 그 순간은 어떤 면에서 목숨이 붙어있지만 죽어있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부활신앙이 꼭 필요할 때입니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남을 통해 가능합니다. 죄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설 때 가능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헤아릴 때 가능합니다. 죽기보다 힘든 용서지만 죽을 각오로 내가 먼저 용서할 때 가능합니다.
때로 완벽해 보이는 이승의 삶이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이승의 삶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맞이하게 될 또 다른 삶에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한낱 서곡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정과 평화 기쁨이 무척이나 커 보이지만 언젠가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 맞보게 될 영원한 삶, 부활의 삶에 비교하면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자질구레한 우리들의 일상사 안에서도 작은 부활을 맛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 언젠가 또 다른 생을 맞이한 때 다가올 결정적인 부활에서도 제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