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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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형제자매가 평등하게 살아갈 세상을 이룩하는 길을 제시하신다. 인간 삶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결코 어려운 길이 아니라,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피조물의 맏이시고,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평화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분만이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소개한다(제2독서). 율법 교사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사랑의 올바른 정신을 가르치신다. 그러자 또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시면서, 사랑의 실천은 종족, 인종, 종교, 국가, 사회 계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마땅히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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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청소년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보스코 성인과 함께 지냈던 청소년들 대부분은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나를 가장 사랑하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각각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신비스럽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단편 『세 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②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③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첫 번째의 물음에 대한 답은 ‘지금’이고, 두 번째의 답은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며, 세 번째의 답은 ‘그 사람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이 만나는 사람에 대한 최선의 노력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도 그렇게 살았기에 수많은 청소년들 각자가 가장 큰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 이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언젠가 완전하게 준비되었을 때야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 그러한 순간은 오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에게 부족하나마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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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를 노래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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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진리를 깨치는 비법을 묻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하며 되물으십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는 그의 답변은 정확했습니다. 영생으로 가는 모범 답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여라.”
영생은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없이는 불가능한 깨달음입니다. 율법 교사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며 다시 질문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우리가 자주 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그 사람처럼 되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영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버거운 일이라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무척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최고봉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완벽한 이웃 사랑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랑의 높은 단계에 오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우 등산을 시작한 사람이 단박에 높은 산에 오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먼저 가까운 사람부터 잘 대해 주도록 합시다.

이웃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
- 홍승모 신부-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율법주의적 사고를 넘어서서 공동체 안에 힘없는 작은 이들을 향해 항상 열려있는 주님 사랑을 체험합니다.
경직된 율법주의적 사고는 오히려 한계에 부딪히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은 율법을 넘어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을 받아들이게 인도합니다.
어떤 경우에 주님 사랑의 깊이는 너무 커서 우리가 그렇다고 늘 믿어왔던 사고의 경계선을 허물어 버리기도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이런 깊은 생각과 행동은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가늠할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는 세상의 길에 휩싸여 주님의 뜻을 올바로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사제와 레위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길 반대쪽으로 피해서 지나가 버립니다. 예루살렘은 주님 현존을 상징하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에 비해 예리코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세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똑같은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거기에 맛 들여 우리는 주님에게서 멀어져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주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도 나오듯이 주님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를 더 깊은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우리가 의도적으로 주님에게서 멀어졌든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버려졌다고 느끼든지, 주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다가오십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우리는 주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이 만남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더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할 것을 거듭거듭 다짐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웃에게서 받은 따뜻함과 친절을 내 안에 묵혀 둔다면 그 또한 빚이 될 것이다. 그리고뭣보다도 내 괴팍하고 인정머리 없는 성미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서운함과 상처를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어느 날 내가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나를 만난 다음에는 사는 일이 더 즐겁고 행복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을 만난 내 삶도 그만큼 성숙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편견을 무너지게 합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과는 무관하고 다른 부류라고 여기던 사람이 오히려 참된 이웃이 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겪은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착한 사마리아인은 어떤 이유에서든 사제와 레위가 방관하고 외면했던 이웃의 고통, 엄격히 말하면 그들 죄를 대신 짊어지고 순례 여정을 계속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사제와 레위의 여정과는 반대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우리는 세상의 죄와 악을 짊어지고 가시는 주님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 교사에게 명확하게 요청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교회 공동체는 말만이 난무하는 새로운 천년기의 꿈을 표상하는 곳이 아닙니다. 실행이 결여된 말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 교사가 답변했던 지식이 그저 말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한계에 부딪히고 말 것입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결국 누가 우리 이웃이냐는 율법 교사의 질문은 누가 우리를 사랑하느냐는 사랑의 실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행동처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행동이 없이는 결코 행복한 세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과 행복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통 받는 이웃에게 힘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행복과 희망의 빛이 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면, 우리는 바로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초주검이 돼 세상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토록 풀어야할 숙제 하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인(聖人)중의 성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여러 덕행 가운데, 참으로 마음에 드는 것 한 가지는 ‘만인형제애(萬人兄弟愛)입니다.
그분에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다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내편이건 저쪽 편이건, 내게 도움을 주는 존재이건, 나를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이건, 모든 것이 다 하느님 사랑의 손길이 담긴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당시 나타나면 다들 멀찍이 돌아가곤 했던 나병환자를 온몸으로 포옹했던 성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죽음’, 그 죽음이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올 때,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자매인 죽음이여!”
늑대는 형제요, 비둘기는 자매였습니다. 오늘날도 프란치스코 성당 복도 한쪽에는 한 쌍의 흰 비둘기가 살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바깥으로 날아가지 않고 성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철저한 자연주의자, 환경운동가, 생태주의자, 인본주의자, 평화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인의 그런 모습 앞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물고기든, 산짐승이든 뭐든 움직이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기를 쓰고 생포하려는 제 모습과 너무나 크게 비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만인형제애’의 원천은 어디일까요?
바로 그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 별것도 없으면서 쓸 데 없는 우월주의에 빠진 유다인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뇌리 속에 가득 차 있던 ‘만인형제애’를 드러내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동족들뿐이었습니다. 하느님 구원의 대상도 이스라엘 백성뿐이었습니다. 지독한 선민의식입니다.
그럼 다른 민족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을 모두 통칭해서 ‘이방인’이라 불렀습니다. 사람취급도 안했습니다. 구원되든 안 되든 상관할 바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이웃에 대한 개념을 다시금 설정해주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 입장에서 봤을 때,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참된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등장인물들, 사제와 레위인, 그들은 유다인 가운데서도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인간 이하의 행동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행동 하나 하나를 따라가 보십시오. 그는 참된 봉사가 무엇인지? 참사람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여러 행동 가운데 눈여겨 볼 것은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입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한 생명이 내 눈앞에서 고통 받고 있다는 그것이었지, 그가 유다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상관없었습니다. 그가 북한주민이든 남쪽 사람이든 문제없었습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위험에 처한 한 사람의 생명, 그것만이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 하나는 사랑의 대상, 사랑의 개념, 사랑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나가는 것입니다.
♧김웅열 신부 (연중 제15주일 강론)
†찬미예수님
비가 오니까 마음이 센티해지십니까? 순례하러 떠나려했다가도 일기에 많이 좌우가 되지요?.
‘멘토’ 라고 하는 단어의 뜻은 영적스승, ‘멘토링’ 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지도자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멘토’ 의 원형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스케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동시에 그분의 섬세함이라고 하는 것은 전율을 느낄 정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인간형의 모습을 세 가지로 구분하시면서 그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배움을 주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 까지는 걸어서만 갈 수 있는데 .그 길에 많은 강도들이 많이 출몰하였습니다.
저도 배낭을 메고 물 하나 들고, 성서에 나오는 대로 예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30여 킬로를 반은 맨발로 반은 신발을 신고 걸어보았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한데 ‘길이 굉장히 좁고, 한쪽은 절벽이다...이런 곳에서 강도를 만나면 여지없이 목숨을 내놓거나 물건을 빼앗길 수밖에 없겠구나!’
오늘 복음에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한 여행자가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되었고, 다 죽어가는 그 사람 곁을 세 사람이 지나갑니다.
한 사람은 유대교의 사제인데 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민수기 19장 11절이 떠올랐습니다. ‘시체의 몸에 손이 닿은 사람은 7일 동안 부정하다!’
이 사제는 하느님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이웃사랑의 계명보다도 의식적인 요구를 더 따지는 그런 사제였습니다.
이 제사장을 가리켜서 ‘형식주의형의 인간’ 이라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성당에 오는 길인데 길에 웬 사람이 복통이 났는지 체했는지, 얼굴이 하얘져가지고 길에서 뒹굴고 있다면 그 사람 데려다가 병원에 입원시키고, 보호자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날 저녁 마지막 미사까지 놓쳤다 해도....그 분, 그것 때문에 성사 볼 필요가 있느냐! 성사 볼 필요가 없습니다.
성당에서는 지극히 모범적인 신자이지만, 집에서는 빵점짜리 신자가 있습니다. 묵주기도 열심히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옆방에는 풍으로 누워있는 시부모가 계시지만, 하루에 한 번도 잘 들여다보지 않고, 똥 싼 시어머니 옆방에 놔두고 자기 방에서 촛불 켜놓고 아름답게 묵주 돌립니다. 바로 이런 인간이 형식주의입니다..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못 베풀면서 성당에 나와서는 오만 일 다 하고 돌아다니는 것, 다 위선덩어리입니다.
두 번째,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이 레위인은 ‘안전제일주의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 도적들은 가끔 속임수를 썼습니다. 몸에다가 돼지피를 바르고, 강도 맞은 사람처럼 신음하면서 아픈 척하다가 행인이 접근해오면 벌떡 일어나서 칼을 들이대고 덮치는 강도가 있었습니다.
레위인은 도와주려고 하다가 ‘저 놈이 강도이면 어떡하나~~’ 36계 줄행랑을 칩니다.안전제일 주의 인간은 이기주의를 낳고, 이기주의는 무관심을 낳습니다.
어제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명동 한 복판에서 10대 유학생 10명이 술을 마시고 22살 된 청년이 어깨를 쳤다고 때려죽였어요. 그 옆에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무서운 아이들이네~’ 하면서 지나갔겠지요.
버스에서 소매치기 하는 모습을 보면 ‘나 못 봤어요!’ 조는 척하거나 창밖을 내다봐요. ‘당하는 분, 안 되긴 했지만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괜히 관여 하다가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 써야 되고...보복 당할지도 모르고, 이 세상은 나만 안 당하면 되지...다른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어!’
십몇 년 전에 제가 청주에 근무할 때, 남편 만나러 간 젊은 자매가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 남편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남편과 차 한잔 마시고 나가는 것까지 남편이 보았는데 그 다음부터 행방불명이에요. 7개월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왔어요.지금도 그 자매는 정신병원에 있어요.
남편을 만나고 서울역 지하도를 건너서 위로 올라왔는데 올라서자마자 갑자기 웬 남자가 귀싸대기를 때리면서 ‘너 이년, 니년이 바람나서 도망치면 내가 못 잡을 것 같애?“ “아저씨, 누구예요?” “뭐, 서방 보고 아저씨?’ 머리채를 잡고 봉고차로 끌고 갔대요.
서울역에 그 많은 사람들이 보고, 전경들도 보고, 수백 명이 쳐다보면서도 “사람 살려! 이 사람 내 남편 아니에요...나 지금 납치되고 있는 거예요.” 봉고차에 안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쳤지만....그 자매는 어디로 끌려갔느냐! 창녀촌으로 끌려 가서 7개월 동안 매일같이 손님을 받았대요. 몇 번 죽으려고 했지만 불쌍한 아이들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대요. 7개월 만에 틈을 타서 도망을 와서 경찰에 신고를 했대요.
그 자매는 아직도 자기의 몸을 더럽힌 그놈도 죽이고 싶지만 그보다 서울역 앞에서 자기를 도와주지 않은 그 인간들이 더 죽이고 싶대요.“ 이런 기가 막힌 일들이 살아가다보면 내 가죽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지요.
예수님께서 이 무관심의 죄가 얼마나 큰지, 무관심의 죄는 내 이웃에게 최소한의 책임감을 못 느낀다는 겁니다. ‘천당 가든 말든 니 신앙 니가 알아서 해라!’ 매사에 ‘안전 위주형’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신 두 번째 인간입니다.
세 번째가 ‘실천형의 인간, 다른 말로 열매형 인간’입니다. 아마 이 사마리아 사람은 먼 곳을 규칙적으로 방문해서 장사하는 사람이며 앞 뒤 상황을 보면 그는 매우 신용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서를 보면 돈을 못 주고 죽어가는 사람을 데려다 두고 “잘 돌보아주세요.”
정통 유대인이라고 자처하는 사제도 레위인도 도망을 쳤지만 유대인처럼 법을 지키고 살지는 못해도 이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그 사람을 도와주었던 겁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그의 마음에 깃들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 유대인들은 속으로는 떫어도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인정했겠지요.
‘이놈아, 너도 가서 그렇게 해라!’
다시 말하면 형식적으로 살지 말고, 안전위주로 살지 말고 무관심하게 살지 말고, 성령께서 네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라! 이 사마리아 사람을 익명의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내 주변에는 성당에 안 다녀도 성당에 다니는 사람보다 더 따뜻하게,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조상들 중에는 세례 받지 못하고 죽었어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느님 ‘하’ 자도 모르지만 우리보다 아름답게 살다가 죽은 사람 많습니다.
‘거지들에게 밥 먹이고, 추운 겨울에 잠재우고.......’ 그럼 그분들 세례 안 받았다 천국 못 갑니까? 천만에~~
제일 무서운 말이 뭐냐? 광신도들이 메고 다니거나 차에 붙이고 다니는 ‘예수천국, 불신 지옥!’ 그것을 쳐다보는 불교신자들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인간들 때문에 싸우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십계명을 주셨는데 십계명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흠숭과 인간끼리의 상호존중이 골자입니다.
야고버서 2장 17절에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버서 2장 22절에 ‘그의 믿음은 행동과 일치했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교우여러분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멘토 로서 당신을 닮은 가장 이상적인 세 가지의 모습을 얘기하시면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누군가와 화해를 해야 되는데...전전긍긍하면서 일 년, 이년이 지나면서 사셨다면 오늘 미사 끝나고 휴대폰으로라도 전화하세요. 아니면 찾아가서 화해를 하세요.
오늘 미사오기 전에 여러분 친척가운데 물질적인 도움을 청했는데 그 절박한 사람을 못 도와주었다면 ’도와주십시오!’
아무리 좋은 피정을 들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으십시오!
제가 다른 곳에 가서 하루에 7시간씩, 피정 중에 많은 이야기 하지만, 그것 다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한 가지만 열매 맺으십시오.
2013년 오늘 하루는 이 김신부 에게도 여러분에게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날입니다.
즉시 미루지 말고 내가 찾아갈 사람 있으면 찾아 가십시오! 전화 걸어서 위로해 줄 사람 있으면 위로해 주십시오!
혼자 계신 엄마에게 전화한지 오래되었으면 미사 끝나고 바로 전화하십시오!
화해할 사람이 있으면 화해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멘토’ 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주시는 영적지도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