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3일 주일 ( 남북통일 기원 미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65년,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변경하였고, 2005년부터는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북한 교회를 위한 기도 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노력해 오고 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었고, 2005년부터는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오늘 전례
▦ 오늘은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서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어 온 지도 어느새 60년이 넘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남북이 지혜를 모아 참된 평화를 이루고, 이산가족들이 서로 자유롭게 만나며, 북한 동포들도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여 주 하느님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라고 권고한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흩어져 사는 당신 백성을 모아들이시어 약속의 땅에서 풍요롭게 살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교회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을 제시한다. 곧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하여 원한과 분노, 폭언과 중상을 삼가고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가르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언제나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며, 형제가 죄를 지어도 끊임없이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복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바닷물이 짠 이유는 소금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닷물의 성분에서 소금이 차지하는 양은 고작 전체의 3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적은 양의 소금 때문에 바닷물은 썩지 않습니다.
‘남북통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 ‘세계 평화.’ 우리에게는 너무나 거창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아, 이 구호들 앞에서 부담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작은 실천에서 시작됩니다. 마치 적은 양의 소금이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 작은 실천들이 모여 거창한 구호를 썩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살려 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들어 봅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우리 겨레의 화해와 일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두 사람이라도 마음을 모으는 작은 움직임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작은 일치가 모여 정녕 온 겨레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남북통일이라는 이상(理想)을 두고서도 바로 옆에 있는 형제들과 마음을 모으지 않는 데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이웃을 용서할 줄 모르고 그들과 마음을 모으지 않는다면, 남북통일의 소원은 그저 꿈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가 9,18-21)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유럽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의 발전과 한국인의 열심 한 신앙생활에 감탄하고 놀라워한다. 한국교회는 살아있으며 아시아의 선교는 한국교회가 맡아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우리 한국 교회는 살아있고 아시아의 선교를 떠맡을 만큼 성숙한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비록 유럽 교회가 잠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믿는사람이든 아니든 내가 만나 본 유럽인들의 심성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적인데 비하여 한국교회는 겉으로는 크게 발전한 것 같지만 안을 들어다 보면 왠지 미성숙하고 그리스도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유럽인들은 생각하는 사고가 그리스도적이고, 몸에 밴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적이고, 그네들의 문화가 그리스도적이다.
그네들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그리스도적이다.
거기에 비해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가 들어 온 것은 불과 2백년이 조금 넘었다. 그 중에서도 약 백 년 동안에 박해와 교회 제도상 외국 선교사에 의존 할수 밖 에 없었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적인신앙 교육을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받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본래 종교적인 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를 쉽게 받아들였지만 유교, 불교적인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우리들의 사상이나 마음까지 완전히 복음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열심하고 희생적이고 생명을 바쳐 순교까지 하는 열성은 있지만 그것은 소수일 뿐 일반적으로는 복음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상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이고 우리의 심성에까지 촉촉이 적셔주지를 못하고 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지금도 복음보다는 불교적인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이 더 많이 마음에 와 닿고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신앙은 어설프고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왠지 급조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런 것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네들의 의식 세계를 볼 수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마만큼 군중들과 제자들의 의식 속에는 한결같이, 구약 성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만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물었다면 누구라고 대답했을까? 석가, 공자, 단군, 위대한 성현 중에 한 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유교, 불교적인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인 복음은 아무래도 낮 설은 것 같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이있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그리스도란 구세주라는 뜻이다. 즉 당신은 나의구세주 이십니다. 라는 고백이다.
사실 이 말은 엄청난 말이다. 나를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십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신가?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생활 속의 구세주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재물이 구세주요, 권력이, 명예가 그리고 나의 남편이, 나의 아내가, 나의 애인이 구세주이다. 나의 취미가 구세주요, 나 자신이 구세주인 경우를 많이 본다. 맥루한은 "아무도 아무에게 아무것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깨닫는 것은 가르쳐 주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이의 자세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어도 배우는 이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이의 자세 즉 배우는 이의 열성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나를 구원해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신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가 복음적이지 못할 때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다. 나의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습관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발전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과 제자들의 고백의 또 다른 차이점은 이런 것이다. 즉 군중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존재는 절대적이신 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중에 한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절대적인 분이 아니니까 절실하게 믿을 필요도 없고 구세주라고 까지 고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여러분들 중에 한분일 뿐이다.
그분이 요한 세례자이든 엘리야이든 옛 예언자 중에 한 분일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분이냐? 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고백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에는 당신은 나의전부 이십니다. 라는 뜻이 담겨있다.
당신만이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으신 분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라는 고백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군중들과 제자들과는 이런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군중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없고 그분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신 분인 예수님을 위해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버렸고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라는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그에 대한 고백은 나의 삶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구세주는 누구인가? 이 말은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유 광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