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성주간’이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주간으로,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의 한 주간을 말하며 교회 전례주년의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하신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특별한 방식으로 기념하고 경축한다.
성주간 월요일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고(요한 12,1-11), 화요일에는 제자들의 배반을 예언하며(요한 13,21-33.36-38), 수요일에는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신 사건을 기념한다(마태 26,14-25). 성주간 목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는 성주간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날들로서 ‘파스카 삼일’이라고 부른다.
성목요일은 사순 시기의 끝 날이며, 예수님께서 성품성사와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한다. 이날 오전에는 각 교구별로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한다. 이 미사에서 한 해 동안 사용할 예비신자 성유와 축성 성유, 그리고 병자 성유가 축성된다. 또한 사제들은 예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주교에 대한 순명 서약을 갱신한다. 성목요일 저녁에는 주님 만찬 미사가 거행되는데, 사목의 이유로 필요하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을 본받아 사제가 신자들의 발을 씻기는 ‘발 씻김 예식’이 이루어진다.
성금요일에는 미사가 봉헌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을 기억하는 ‘주님 수난 예식’이 거행된다.
이렇게 한 주간 동안 이어지는 주님 수난에 대한 묵상은 성토요일을 거쳐 부활 성야 예식 전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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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로,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을 전례 안에서 성대하게 기념하지만 동시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예고하는 날이다. 교회는 이날 성지(聖枝) 축복과 성지 행렬의 전례를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고, 수난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이러한 전례는 4세기경부터 시작되어 10세기 이후 서방 교회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루카 22,14 ─ 23,56)
They continued their shouting,
“Crucify him!
Crucify him!”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우리를 일깨워 주신다. 귀를 열어 주시어 당신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그러니 거역해서는 안 된다. 뒤로 물러서도 안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반드시 지켜 주신다.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다. 고난 속에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을 낮추셨고,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다. 십자가의 죽음 또한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행동이셨다.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예수님의 겸손과 순명을 묵상해야 한다(제2독서).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수난 복음이다. 그분께서는 아무런 변명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죽음까지도 순명으로 받아들이신다.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는 행동이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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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우리는 길고 엄숙한 수난 복음을 읽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고, 심문받고, 사형수 ‘바라빠’와 비교되는 장면들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이 복음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는지요? 유다인들은 새로운 임금이 출현하면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오늘의 우리 역시 그런 의미로 성지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말합니다. 우리가 환영하는 예수님은 임금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수난하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복음 내용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예수님’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무 저항 없이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를 믿는 이들도 그렇게 ‘삶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자신의 뜻을 꺾지 않으면 십자가는 무거워집니다. 성질대로 하면 점점 귀찮아집니다. 자신을 죽이려 할 때 은총은 ‘그 사람 안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전혀 예기치 않던 곳에서 하늘의 힘을 얻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억울함을 체험합니다. 실패를 만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수난 복음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시라면, 우리 역시 당당한 ‘조연’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아픔’을 의미 없는 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일생에도 사순 시기에 해당되는 시련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체험’ 역시 반드시 주어집니다. 오늘은 이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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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군중 안에 파묻혀 있을 때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보다는 집단이나 현재의 상황에 더 초점을 맞추어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군중 심리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줄여 보겠다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의 생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특히 먹이 사슬의 맨 아래에 있는 초식 동물들일수록 거의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이는 자신의 존재를 집단 안에서 희석시킴으로써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확률을 최소화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사람도 동물처럼 군중 안에서 자신의 익명성에 대한 보장을 통하여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줄이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오늘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갑자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성난 군중으로 돌변한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익명성 안에서 희석시키려는 비겁한 인간의 본성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군중의 태도에 분노가 아닌 연민의 감정을 느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직 본능적인 감정에만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연민과 탄식의 표현일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과 책임을 세상에 용기 있게 드러내는 신앙인만이 예수님의 이러한 아픈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된 제자들일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모습"
-홍승모신부-
어느 화창한 날 오후에 두 아이가 사과와 배로 인해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과가 최고야. 사과가 제일 맛있어." "아니야, 배가 더 맛있어."
나중에는 주먹질까지 하며 싸우게 됐습니다. 마침내 아이 부모들이 달려와 똑같이 두 아이를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나자 상대 아이를 야단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어른들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은 사과 과수원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배밭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싸운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 나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사과밭 주인도 있고, 배밭 주인도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두 패로 나뉘어 똑같이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싸움에 지친 마을 사람들은 존경하는 한 현자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현자는 그 사과와 배를 받아들고는 말했습니다.
"복숭아를 가지고 왔구나." "아닙니다. 이것은 사과이고, 이것은 배입니다."
현자는 사과와 배를 맛있게 먹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시 복숭아가 맛이 있구나."
우리는 자기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봅니다. 시기와 다툼은 이 눈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신이 제일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눈을 통해 보이는 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저 지평을 바라볼 줄 아는 넓은 내면의 시야가 필요합니다. 눈에 비치는 십자가를 그저 바라볼 때, 그것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내면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거기에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삶의 근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수난 여정에서 주님이 뜻하는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세상 이치와 달리, 주님의 용서는 증오하고 시기하며 단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당신의 사랑으로 승화시켜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것이 주님의 사랑과 용서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영광을 찾고,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은 대부분 경우에 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비아냥거리며, 다른 것에서 그것을 찾으려는 태도는 유혹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주시는 주님은 우리를 결코 저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삶이 행복하지 않고, 심지어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이는 삶 가운데 슬픔과 근심과 두려움과 고뇌에 빠져들 때도,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잊었다고 느끼고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자신의 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혀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루카 22,40)는 주님의 음성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다시 사랑의 불꽃이 일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이런 주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주님 십자가와 함께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고 함께 하시는 방식은 세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 결말이 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주님의 영광스런 빛이 드러납니다. 죽음의 어두운 순간에 주님의 빛이 비로소 발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놀랍게도 주님 영광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2-43).
주님은 인간 실존의 모든 고통과 상처를 사랑으로 품에 안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아온 삶과는 아주 다른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품에 안으십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사랑에서 피어오르는 영의 불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는 주님 뿐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달려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삶의 방향이 결정되고 열리게 됩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당신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손용환신부-
창
예수님의 죽음을 그린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창>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이 성화는 루카복음 23장 33~46절과 요한복음 19장 16~37절이 그 배경입니다.
그림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윗부분에는 십자가에 처형된 세 사람이 보이고, 아랫부분에는 처형된 죄수들의 주변인물들이 보입니다. 그림의 위와 아래를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창입니다. 그래서 이 성화의 제목이 창입니다.
먼저 윗부분을 봅시다. 그분의 오른쪽에는 나쁜 강도 한 사람이 예수님께 절규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 그의 절규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단지 죽음에 대한 분노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만 있습니다.
그분의 왼쪽에는 선한 강도 한 사람이 다른 죄수를 꾸짖으며 예수님께 애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그의 애원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그의 마지막 희망을 반영하듯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중앙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 명패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적혀 있고, 예수님의 다섯 상처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립니다. 그분은 죽어 있지만 그분의 근육은 풀리지 않고 힘이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선한 강도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분은 마지막 순간에도 오늘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는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이 애처로워 태양마저 빛을 잃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얼굴에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가득합니다.
이제 아래쪽을 봅시다. 세 부류의 인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숨지신 것을 확인하고 그분의 옆구리에 창을 찌르는 군인과 처형자들이 한 부류이고, 그분의 죽음을 보고 깊은 슬픔에 잠겨 애도하는 어머니와 제자와 추종자들이 다른 한 부류이며, 그분의 죽음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구경꾼들이 마지막 한 부류입니다.
구경꾼들은 빈정거리며 말합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
군인들도 그분을 조롱하며 말합니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 23,37) 그러나 그분께서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다른 군사 하나는 이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또 다른 군사 하나는 강도의 다리를 부러뜨리기 위해 못을 빼어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슬픔이 가득합니다. 어머니는 죽음의 색인 검은색 옷을 입고 시선을 아들에게로 두지도 못한 채 넋을 잃었습니다. 그분의 충혈 된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요한도 사랑하는 스승의 죽음이 너무나도 슬퍼 눈을 가리며 어머니께 기댑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분의 발에 흐르는 선혈을 보고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여자 중 한 사람도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봅니까? 처형자입니까? 추종자입니까? 아니면 구경꾼입니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신희준신부-
우리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우리 인간들이 사는 지상으로 파견하셨습니다. 아드님이 부여받은 사명은 인간들의 죄를 모두 사해주고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대신해서 파스카 축제 때 바쳐지는 어린양처럼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때’가 다가오자 아드님께서는 긴 여정(루카 9,51~19,27 참조)을 마치고 제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혁명을 일으켜 강력한 새 이스라엘을 세우시리라는 제자들의 장밋빛 희망과는 달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시고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든 제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다처럼 적극적으로 처신하기로 마음먹은 제자는 예수님을 제거할 방법을 찾던 예루살렘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
수님을 넘겨줄 것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는 이들의 증오에 찬 시선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면서도 자신들의 기대에 예수님께서 과연 부응해주실 수 있을까 하는 제자들의 불안에 찬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또박또박 자기 길, 곧 ‘수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예수님의 확신에 찬 모습과 제자들의 흔들리는 불신의 모습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사실 수난의 길을 예수님이라고 마냥 기쁘게 걸어가지는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바친 예수님의 기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와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진 예수님의 땀은 예수님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잘 대변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 흔들림 없이 충실하게 자신의 수난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 남기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십자가는 위대한 책입니다. 그 책에서 저는 정성과 사랑을 다하여 최상의 지혜를 담고 있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저는 이 위대한 책을 척도로 삼아 세상의 일들과 지식들을 판단하는 습관을 가져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보통 희망하는 유쾌하고 유복한 생활과 정반대의 삶을 상징합니다. 돈이 많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자기 삶의 척도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돈과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기를 십자가는 요구할 테니까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 심정일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유일한 문입니다. 동시에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을 맞이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주간 동안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을 따라 걷지 않으시
겠습니까?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서울 대교구 이 기양 신부-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부활 대축일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한 주간은 부활 대축일을 향해서 나아가는 성주간으로 그 중에서도 절정인 성삼일은 유다의 배반과 최후의 만찬,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극적인 부활로 이어집니다. 십자가 처형이 있기 이전에 예수님 수난이 시작되는데 오늘이 그 시작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부활이 있기 전에 참혹한 시련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차에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예수님 말씀대로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십자가를 집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런 고통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고통을 자초했고 성경은 이를 '원죄'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 일치를 잃어버린 이 원죄 상태에서 우리는 분열과 고독, 죄책감 등 불완전한 감각을 얻고 불행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원죄를 극복하고 원죄 이전의 에덴동산으로, 즉 부활의 영광으로 다시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만 크고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지고 남들의 십자가는 모두 대수롭지 않은 가벼운 것이라고 불평을 합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십자가는 너무나 무겁고,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는 작다고 하느님께 투덜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저에게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까?"
그 말을 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 십자가를 바꾸어 주마."
그러고는 그에게 맘에 드는 다른 십자가를 고르라고 하시며 십자가가 가득한 창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좀 가벼워 보여 들어보면 그것도 무겁고, 작다 싶어 지어 봐도 그것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르고 고르다가 그는 번쩍번쩍 금으로 된 십자가 하나를 골랐습니다. 가운데에 아름다운 보석이 박힌 눈부시게 아름다운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 골랐습니다.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기뻐하며 자기가 고른 보석 십자가를 냉큼 짊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그 십자가는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몇 발자국 가지 못해서 어깨 살갗이 벗겨지고 다리가 저려왔습니다.
"아이고, 주님, 너무 무거워서 안되겠습니다.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그래? 바꾸어 주마."
그는 심사숙고하여 십자가를 골랐지요. 이번에는 아주 가볍고 향기로운 장미화관 같은 십자가를 골랐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십자가를 지던 그는 곧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아얏! 따가워."
이번 십자가는 향기도 좋고 가벼웠지만 가시들이 사정없이 찔러대었던 것입니다.
"아이고, 주님, 이것도 안되겠습니다.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세요."
그는 들어보고 내려놓고, 들어보고 내려놓고 하며 이거다 싶은 십자가를 하나 골랐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으로 들고 갔습니다.
"하느님, 드디어 골랐습니다. 가벼운 십자가로 바꿀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웃으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라. 그 십자가는 처음에 네가 졌던 바로 그 십자가란다."
그렇습니다. 내 십자가는 무거워 보이고 남의 것은 다 가벼워 보이는 것이 연약한 우리 마음의 속성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거부하고 외면하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외면하고 돈의 유혹에 빠져서 다른 길을 찾아가다가 멸망의 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나의 십자가는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분신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주간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지만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시간 한결 같은 사랑을 쏟아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풍부한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감탄고토’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배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백성들이 꼭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에 제자들은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길가의 나뭇가지를 꺾어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19,38)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군사정권을 물리치고 유다민족을 1등 국민으로 독립을 시키며 수천 년 기다려온 메시아로서 부와 권력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옷을 길바닥에 깔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친 것입니다. 당시의 겉옷은 단순히 옷 그 이상의 것입니다. 겉옷은 담보 삼을 수 있을 만큼 중한 것으로 밤을 넘길 수 있는 이불이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고 주님을 환영하였던 그들인데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그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루카23,21)하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고할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꾸중을 들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며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26,31).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 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22,33).하고 장담하였습니다. 그것은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자기도 모르게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닭이 울고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목놓아 울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연약합니다. 강한 것 같지만 시련과 고통의 두려움 앞에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약함 때문에 주님께 더 간절히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의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만을 믿고 방심하면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부활의 삶을 믿는다.’고 선언하고서는 그 부활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환이 생기면 성체 앞에 쫓아와서 기도할 생각보다도 ‘어디 용한 사람 없나?’‘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더니만…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자녀의 결혼 날짜를 정하는데도 길일을 정한다고 점쟁이를 찾고 사주팔자를 보시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와서 묵주기도를 하며 기다렸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점괘가 좋고 사주팔자가 좋으면 뭐합니까? 노력하지 않는데! 아무 노력 없이 복이 굴러옵니까?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하실 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 하셨습니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하였습니다. 너만 있으면 앞날이 열리고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눈에 꽁깍지가 씌워져 보이는 게 없었죠. 그래도 어찌 되었든 하느님과 일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신의를 지키며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선언해 놓고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기 뜻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바가지 긁고, 변명을 늘어놓고…….
자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한다고 해놓고서는 신앙은 자유라고 합니다. 커서 자기가 판단해서 선택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육은 왜 하십니까? 자기가 커서 알아서 하게 두지. 신앙교육은 다른 것에 우선해야 합니다. 모든 가르침은 ‘주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는데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배운 것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 마음에 들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부모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신을 뱉어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혹 죄를 짓게 된다면 잘못을 뉘우치고 허물을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여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으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하느님께 알게 모르게 약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는 행위가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숨을 거두시는 광경을 목격한 백인대장이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23,47).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조롱과 모욕, 억지로 우겨대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한마디의 항변과 변명도 없이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백인대장만큼은 의로움을 발견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흉을 본다면 그렇게 침묵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과 처지에서 그리고 구설수에 침묵의 언어로 사랑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깊은 침묵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고 사랑을 담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머튼은 “왜?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흠숭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순간 흠숭을 드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성주간입니다. 거룩함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