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루카. 1,1-4; 4,14-21)

2013. 1. 27. 오전 7:49:46

글자

 

2013 127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1,1-4; 4,14-21)


말씀의 초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서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때 율법 학자이며 사제인 에즈라가 온 백성 앞에서 율법서를 봉독하고, 레위인들이 이를 해석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게 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제1독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 각자가 그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알려 주신다. 그리고 당신의 존재 자체로 이미 그 사명이 실현되었음을 선포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여느 사람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시다가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시작점에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들이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밝히시는 출사표와 같습니다. 이를 이사야서의 말씀에 따라 선포하셨으니, 당신께서는 성령의 세례를 통한 기름부음받은이로서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과 은혜를 안겨다 주시고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시는 일의 진정한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시절에, 사법 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금의환향한 한 선배가 모교를 방문하였습니다. 우리 수험생들과 간담회를 가졌는데, 그때 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사법 고시를 보셨는지요? 법조인이 되고자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 선배는 ‘현실적으로 직업도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것이 사법 고시에 합격해서 판사나 검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참으로 실망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그 일이 지닌 진정한 목표와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없다면 그 일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를 의식하면서 그 생활을 시작하셨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모든 일에 대해 한층 더 근본적인 성찰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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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확신에 차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을 느낀다면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물질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가난과 소유는 별개의 것입니다. 물질이 많다고 ‘자동적으로’ 가난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돈과 재물이 넉넉한데도 가난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물질에서 ‘자유로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일은 은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입니다. 진심으로 청해야만 주님께서 오십니다. 오셔서 삶을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사건과 만남’이 그분께서 오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니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처럼 느껴졌을 뿐, 실제로는 그분의 개입이었습니다. 기쁨과 자유를 주시려는 개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힘을 청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던 분이십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했는지요? 우리는 기도하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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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독서 : 느헤 8,2-4a. 5-6. 8-10 제 2독서 : 1고린 12,12-30
시  편 : 19, 8--15    복   음 : 루가 1,1-4 ; 4,14-21

이 주간의 제 1 독서와 복음 사이에는 이야기의 내용상으로는 근본적 차이점이 있지만 의미상으로는 서로 일치되는 점이 있다. 즉 말씀의 규범이 바로 그 점이다. 말씀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느님 백성의 궁극적이고도 명백한 가치의 기준이다. 그리스도까지도 이 말씀에 매여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말씀의 가장 충만한 표현이시며 완전한 실현이시다. 그분만이 결정적인 ‘말씀’이시기에 앞서 행해진 모든 말씀이 그분을 통해 재반향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로의 편지의 한 대목이 이 점을 잘 말해 준다:“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1,1-2).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루가에 의한 오늘 복음이 어째서 몇 개의 장을 건너뛰고 서론 부분과 나자렛 회당에서의 예수의 이야기-이사야서(62,1-2)를 읽으시면서 그날 성서의 말씀이 그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를 결합시키는 좀 별난 구성을 하고 있는지르 알아들을 수 있다. 층계송도 시편 18을 통해 하느님의 법을 찬미하고 있으며, 그 법은 ‘말씀’이 표현되는 특별한 하나의 형태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도와주고, 주님의 법은 건실하여 둔한 자를 가르치도다”(8절).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고양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또한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를 위해 갖는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것들이 오늘 전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에즈라는 해뜰녁부터 해가 중천에 이르기까지 그 법전을 들려주었다” 
 
 

우선 느헤미야에 의한 제 1 독서의 내용을 살펴보자. 그것은 기원전 444년경 사제이며 선비였던 에즈라가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이미 성도를 재건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의 법’을 선포하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계약의 의무는 재인식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벽만 재건하다면 그것은 아무 쓸데도 없는 일일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서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보호하실 그 계약의 의무에 충실할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에즈라가 ‘모세의 법전’(느헤 8,1)-그 당시에 이미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모세오경을 실질적으로 담고 있었던-을 공적으로 장엄하게 낭독하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그날 사제 에즈라는 그 법전을 가지고 회중 앞에 나타났다. 그 자리에는 남자와 여자, 아이들에게 이르기까지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모여 있었다…그는 수문앞 광장에 나타나 해뜰녘부터 해가 중천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셈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들려주었고 온 백성은 그 법전을 귀담아들었다…에즈라가 모두 쳐다볼 수 있도록 높은 자리에서 책을 펴 들자 온 백성은 일어섰다. 에즈라가 높으신 하느님 야훼를 칭송하자 온 백성도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하며 무릎을 끓고 땅에 엎드려 야훼를 예배하였다”(느헤 8,2-6).
 

이와 같이 하느님의 법에 대한 참되고 고유한 전레적 낭독을 에즈라가 한 바로 그것과 같이, 모든 백성 앞에서 이루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일어서고, 손을 쳐들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아멘’ ‘아멘’-그리스도교 전례상 동의를 나타내는 고전적 형태의 응답-이라고 외치며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여’로써 이루어진다. 7절에서는 레위인들이 백성들에게 선포된 바를 들을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의미를 풀이해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곧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주일강론’과 같은 것이 아닐까!
 

마지막 부분에서는 ‘하느님의 법’을 성대하게 읽은 결과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모든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9절).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처벌을 받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에즈라와 다른 레위인들은 백성들에게 그날이 결코 슬픔의 날이 아니라 기쁨의 날이 되리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가서 잔치를 차려 배불리 먹고 마셔라. 미처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거든 그런 사람도 빼놓지 말고 몫몫이 보내주도록 하여라. 이날은 우리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킬 날이니 슬퍼하지 말라. 야훼 앞에서 기뻐하면, 너희를 지켜주시리라”(10절).
 

그러므로 ‘하느님의 법’을 낭독함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회개’의 정을 불러일으켜 후회와 괴로움에 싸이게 했고 또한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게 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내면에 새로운 정신을 갖게 되었다는 구체적 증거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열렬히 선포하고 들음으로써 변모되는 전례 공동체, 바로 이것이 오늘 느헤미야서에 의한 제 1 독서가 전해주려고 하는 메시지이다. 말하자면 위에서 일어난 모든 것이 우리의 전례 공동체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 심판의 능력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을 변화시킬 능력도 갖고 있다는 확실한 신앙심에 의해 전달되지 않았거나 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역시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바 있으므로…” 

 
오늘 복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첫부분은 루가복음사가가 자기의 복음을 저술하기에 앞서서 그것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를 설명하는, 품위있게 꾸며진 서문(1,1-4)이고, 둘째 부분은 예수께서 공생활 초기에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신 후 나자렛에 돌아오신 후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4,14-21).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를 죽이고자 했으나 실패하는 예수의 고향 사람들과 예수와의 극적인 살벌한 만남은 일단 접어두고 있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득ㄹ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드르이 한가운데를 지나서 갈길을 가셨다”(루가 4,28-30). 이와 같은 이야기의 맺음 부분이 빠져 있는 이유는 오늘 전례의 목적이 하느님 말씀의 ‘규범’과 ‘변화의 능력’ 그리고 우리의 ‘결단’에 대한 촉구를 강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이 무엇을 가르쳐주고자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루가복음의 ‘서문’부터 살펴보자. 여기서 루가복음사가는 세세대대로 신자 공동체를 이루어주기 위해 전달되는 생활한 실체로서의 하느님 말씀의 신비의 중심부로 우리를 안내한다(루가 4,3-4). 그러므로 이 복음이 봉헌되고 있는 데오필로-우리는 그에 대해 다른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이(1절)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옴으로써 우리에게도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 구원적 사건들에 직접 참석하지 못한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루가복음사가가 제일 염려하는 바는 그의 복음을 널리 폄에 있어서의 내용의 충실성에 관한 것이었다:“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바 있으므로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각하께 써 보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음니다. 그러하오니  이 글을 보시고 이미 듣고 배우신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루가 1,3-4).
 

그러므로 성루가가 전하고자 하는 그 메시지는 멋지게 다듬어지거나 임의로 조작된 그런 것이 아니라 글로나 말로나 확실한 출전에 의존함으로써 충실하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그런 메시지다:“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사실 그대로입니다”(루가 1,2).
 

이와 같이 목격증인으로부터 구전을 통해 마침내 기록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증거’의 고리 때문에 우리는 그 구원적 사건들의 핵심 자체에 다다를 수 있고 또한 그 사건들의 역사적 유효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테오필로의 신앙처럼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루가복음사가는 그의 복음이 충실한 해석과 연결되어 내용상의 견고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사실이 곧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앙심을 생기게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 구체적인 예를 나자렛 고향사람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은총의 말씀’(22절)을 찬미하면서도 그분 앞에서 취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어떤 사실들, 예를 들어 그분이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요셉의 아들’(22절)이라는 사실 같은 것 외에는 그분 안에 들어 있는 그 이상의 어떤 사실을 파악함에서 이루어진다. 복음사가들이 자신들의 이야기와 또 어떤 사실들에대한 해석을 통해서 독자들을 이끌어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의 보다 깊은 차원이다.
 

예수께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점을 쉽게 추론해낼 수 있다:“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루가 4,14.16)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성에게 주어진 성서봉독의 권리를 행사하신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순회 설교자로서의 명성에 힘입어 회당장의 권한에 좌우됨이 없이 성서의 내용을 설명해 주신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예수께서 그때 읽으신 성서대목은 이사야서 가운데 한 대목이다:“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2).
 

여기까지는 다만 이사야 예언자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되리라고 선포했던 해방과 구원의 옛 약속이 되풀이되는 것을 들은 이스라엘 각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시금 기쁨과 희망의 정이 끓어올랐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이상한 점은 없다. 이상한 일은 예수께서 성서봉독을 마치시고 두루마리를 다시 건네주신 뒤 자리에 앉으시어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그 내용을 설명해주실 때 일어난다:“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0-21).
 

듣는 이들을 당황케 하고 실제로 그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기로 작정케 한 것 은 에수의 설명 내용이다. 사실 예수의 말씀은 아주 터무니 없고 믿을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그 첫째는 이사야 예언자의 그 말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주님의 성령’의 옷을 입은 한 신비스러운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 바로 ‘마리아의 아들’ 또는 나중에 사람들이 경멸하는 뜻으로 말하는 ‘요셉의 아들’인 바로 그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는 점이며, 둘째는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활동이 이미 바로 그 순간 즉 ‘오늘’이루어진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나자렛 예수를 그 예언적 메시지의 실현자로서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서 ‘즉시’그 무언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써 가르치시며 구원활동을 이루신다. 은초으이 때가 가난한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그리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시작된다. 그러므로 루가복음 속의 예수는 바로 억압받는 이들의 구원자시다. 예수께서 가져오신 가장 큰 선물은 해방이다:즉 육체적, 영신적 시력상실로부터의 해방,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종살이로부터의 해방,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머무시는 한 ‘주님의 은총의 해’는 계속된다. 예수 이전의 사람들은 그 은총의 해야말로 역사의 중심이며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그 은총의 해의 기쁨과 영광을 통해 이샤야 예언자가 예언한 내용-‘야훼께서 우리를 반겨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이사61,2)-이 참된 의미를 갖게 된다. 메시아는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을 비추어주는 구원을 베푸시는 자이며, 결코 처벌하시는 심판자가 아니시다”(A. Stöger, Vangelo secodo Luca, vol. Ⅰ, Città Nuova Ed., Roma 1966, pp.133-134).
 

나자렛 예수를 인간의 전체적 해방의 유일한 실현자로서 받아들이는 이러한 태도는 오직 신앙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즉 그의 고향사람들은 ‘마리아의 아들’을 진실되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가 그렇듯 위대한 일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로 보엿다. 그들은 해방의 계획을 내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해방자와 분리시키려 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와 같은 함정에 떨어지고 있다.
 

정말로 나자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에게는 그 예언적 말씀뿐만 아니라 특히 그리스도께서 그 옛날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하신 말씀이 ‘규범’이 된다:“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그 ‘오늘’이 매일매일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다. 

주님의 은혜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신의 은혜로움 속에 살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은혜로움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옛말에 영지와 난이 자라는 곳에 절로 길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참된 권위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누가 모여 들고 있나요?

오늘 복음은 나자렛 회당에 가신 예수님을 소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읽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 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되리라고 선포했던 해방과 구원을 약속한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읽으신 후 한마디 덧붙이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결국 이 약속이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영육으로 가난하고 묶이고 눈멀고 억눌린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은총이 당신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억압 받는 이들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예고한 바를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성경의 말씀을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히브4,12)으로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 말씀은 영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1,24-25).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성경말씀을 통하여 물리치셨고, 말씀 한마디로 악령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라 해서 그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지혜서에는 그들을 고쳐준 것은 어떤 약초나 진통제가 아니었고, 만물을 고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며 사람을 지옥문까지 데려 가실 수도 있고 데려 내오실 수도 있다.(지혜16,12)며 능력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맛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귀들이 인간을 유혹해서 파멸시키려고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을 접수하였는데 1).하느님이 없다고 소문을 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기에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2). 지옥이 없다고 선전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갈 줄 알기 때문에 안 된다. 3.그렇다면 차라리 그리스도인을 적극적으로 죽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오히려 더 큰 신앙의 씨앗이 된다 는 것 때문입니다. 결국 4).지혜를 짜내 예수를 믿게 하자. 열심히 기도도 하게 하자. 전교도 적극적으로 하고 사랑도 많이 하게하자. 그러나 무슨 일이든 내일 하도록 만들자. 하고 결론을 내렸답니다.

하느님의 달력은 오늘이요, 마귀의 달력은 내일입니다(스펄전). 그러므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우리의 인생이 언제 어떻게 변할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6,2) 그러므로 한 순간도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느 날 강론을 통해 성경 읽기를 권고하면서 눈이 안 좋아 글을 읽는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도 눈이 더 나빠져서 못 보게 되기 전에 한자라도 더 읽겠다고 마음을 먹고 읽으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께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안보이던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할머니는 말씀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육적인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이 뜨여 그 기쁨은 날로 더 커갔습니다. 만약 할머니께서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성경 읽기를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육적인 눈도 영적인 눈도 뜨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행하는 데서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이 구원의 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하였는데 은혜로운 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50년마다 경축한 희년을 말합니다. 기쁨의 해입니다. 그 희년의 목적은 어떤 이유로든 빚을 지게 되어 가족의 소유와 자유까지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떳떳한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노예들을 풀어주고 잃어버린 권리를 무상으로 되찾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억눌린 어둠의 상태를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밝혀 주시고, 죄의 용서와 한없는 사랑을 통해서 자유를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새 삶과 해방의 기쁨을 어떻게 누릴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귀한 능력의 말씀으로 다가오셔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권고를 듣지 않아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모세가 세워놓은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 그러나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결국 향기가 있고 꿀이 있어도 내가 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주님의 은혜로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십시오. 능력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빛이 생겨라 하면 빛이 생기고,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 사탄이 물러가는 힘을 지녔습니다.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야고1,21). 그리고 성체를 자주 모시기 바랍니다.
성체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요한복음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고 적고 있습니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말씀과 하나가 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2코린9,8). 주님과 늘 함께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슬플 때면 성경을 펴십시오. 그대를 위로할 구절이 나와 있을 것입니다. 의혹과 두려움이 있을 때에도 그렇게 하십시오. 성인들은 불확실 하거나 걱정이 있을 때마다 이 은총의 샘을 찾았고 시원한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말씀을 통해 매일을 은총의 순간으로 엮어 가시고 그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신부님께서 성당에서 물건을 훔쳐가는 꼬마를 붙잡았습니다.
신부님이 꼬마에게
얘야! 성경이 도둑들에게 뭐라고 말하였는지 아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꼬마가 자신 있게
예,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한 청년이 신부님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청년이
신부님,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하필이면
십 원이 아니라 구원을 주셨는지 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청년이 아주 진지하게 말하였습니다.
그 일원은 하느님께서 이미 십일조로 떼어 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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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포되는 말씀의 은혜.

연중 제3주일 루카복음. 1,1-4; 4,14-21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강 길웅 신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사람들은 감동했으며 그분 말씀 의 위력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말씀'은 실로 말씀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말씀은 그냥 예사 말씀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이 생겨라."하시자 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생성과 세상의 모든 만물 이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이루어집니다.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나병환자가 그 즉시 깨끗해지고 죽은 자가 벌떡 일어섰으며 온갖 종류의 병자들 이 완쾌 되었습니다. 말씀은 실로 보통 말씀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하느님의 능 력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하느님의 말씀을 경외해야 합니다. 한 집안에서도 어른의 말씀 에 순응할 때 평화와 기쁨이 있듯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말씀을 소중히 간직 하고 그 말씀에 따라 실천해야 합니다. 거기에 백성의 평화가 있고 열린 미래가 있으며 또한 소망의 성취가 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면 백성은 여지없이 짓밟혔 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와 그 역사의 과정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백성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흥망성쇠는 오로지 하느님 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바빌론의 유배는 그에 대한 백성의 눈을 환하게 뜨게 해 줬습니다. 그들은 노예생활을 통해서 말씀의 소중함 과 위대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사제 에즈라가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타락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있는지 조차 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에 끌려가 종살이를 하는 동안 뉘우치고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유배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에즈라와 느헤미야 의 주도로 성전 재건 운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다시 짓고 성곽을 쌓는 데는 백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사가 완공되고 보니 너무도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제 하느님 앞에 체면이 좀 서는 듯했습니다. 그때는 마침 초막절이라는 명절이었는데 사제 에즈라가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 의 법전을 꺼내어 읽자 백성들이 너무도 감격해서 울었습니다. 말씀에 불충 실했던 과거의 죄악 때문에 울었으며 그렇게 좋은 말씀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축제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백성들은 그때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자고.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율법을 소중하게 간직하자고. 바로 그때부터 율법을 본격적 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율법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에즈라는 바로 첫 번째 율법학자인 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나 백성도 뭔가 실패해서 약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에 눈을 뜬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은 약한 자 안에서 강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2독서에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요 서로가 그 지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몸 가운데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더 요긴하다고 했으며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보기 흉한 부분을 보기 좋게 꾸민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들이 화장을 할 때도 얼굴에서 가장 취약 되는 부분을 더 신경 써서 꾸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약한 것에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의사의 마음이 건강한 자보다도 병 든 자에게 있는 것과 같으며 하느님의 사랑도 죄 없는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 죄 중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더 가까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자신이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구약에서 말한 모든 것이 당신 안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죄 많은 세상이 이제 구원을 만났습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으로 집약이 됩니다. 거기서 완성이 되고 거기서 구원이 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 슬퍼하는 이들, 그리고 병자와 약자들 안에서 그분의 말씀이 힘을 줍니다. 하느님은 진정 실패한 자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말씀을 믿고 존경해야 합니다. 세상에 말들도 많고 좋다는 말씀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는 말씀,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씀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뿐 이십니다. 따라서 그 말씀을 소중히 간직합시다. 그리고 말씀대로 실천 합시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지혜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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