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오 2,1-12)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을 축복하신다.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는 영광의 도시가 된다. 예루살렘 바로 옆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이 있다(제1독서).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공동 상속자가 된다. 이것이 곧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이다(제2독서). 구세주의 탄생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임은 구약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의 방문은 이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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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영원할 것이다. 모든 민족들은 예루살렘을 찬양하며, 이방인의 임금들도 그 앞에서는 몸을 숙일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모든 일은 전능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제1독서). 인류는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형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누구나 하늘 나라의 유산을 이어받게 된다. 이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은총이다(제2독서). 동방 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다. 별의 인도로 미지의 세계에서 찾아온 것이다. 그들의 용기는 믿는 이들에게 모범이 된다. 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다. 가장 값진 것을 바친 것이다. 그런데 헤로데는 호기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복음).
말씀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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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늘의 별빛이 구세주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별이 온 누리를 비추었음에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표징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구원의 별빛에 대한 네 종류의 반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시민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구세주의 별이 뜬 것조차 모릅니다. 아예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에만 골몰할 뿐 생사의 문제인 신앙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의 반응은 헤로데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하늘의 별빛은 구원의 표징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별을 보면서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세 번째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별빛의 의미를, 또한 그 별이 어디에 멈추게 될지도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삼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경배하러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 별빛이 무의미하거나 위협적이거나 머리로만 되새기는 것일 뿐 기쁨의 초대장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동방 박사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구세주의 별빛을 찾았고 따라갑니다. 제2독서에서 선포된 것처럼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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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러 먼 곳에서 왔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다만 그들은 별의 인도로 왔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별’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인도하는 별입니다. 사건이든 만남이든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이 ‘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다.’, 이렇게 느꼈다면 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만남에는 분명 주님의 힘이 관여하고 계신다.’, 이런 느낌이 들었다면 ‘별의 기운’이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동방 박사들처럼 용감해야 합니다. 물러나지 말고 이끄심을 따라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박사들처럼 예물도 바쳐야 합니다. 살면서 만나는 ‘인연의 아픔’입니다. 살면서 부딪히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입니다. 그것을 예물로 만들어 바쳐야 합니다.
바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인정하며 받아들일 때 ‘봉헌’이 됩니다. 아픔이 ‘진할수록’ 황금이 되고, 유향이 되고, 몰약이 됩니다. 올해에도 주님께서는 ‘숱한’ 별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그 별을 붙잡고 따라간다면, 우리 역시 복음의 동방 박사가 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의 출현은 공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공현이란 말을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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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드리는 최고 선물은?"
주님 공현 대축일은 주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 날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황금과 유향은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말씀대로 임금에게 드리는 봉헌물입니다.
"그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6).
이 세 가지 봉헌 물은 이방인들이 태양신에게 바치는 예물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참된 빛이 떠오른 것입니다. 황금은 위대한 임금을, 유향은 위대한 신, 곧 하느님을 상징하며, 몰약은 죽은 이에게 바르는 약초로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 공현은 성탄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드러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응답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어떤 것을 봉헌해야 합니까? 우리가 드려야 할 황금은 무엇입니까? 황금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움켜쥐고 싶어 하고 그래서 얻기를 갈망하는 최고 가치입니다. 그래서 황금은 세상의 힘을 상징하고 세상을 통치하는 임금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임금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세상에서 임금처럼 사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죽이셨습니다.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기에 아버지께서 뜻하신 모든 것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를 임금처럼 드높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우리는 황금이 아니라 이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사랑이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사람이 되신 순간부터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인간 손에 의탁하고 그 처분에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사랑의 가장 본질인 자기 자신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최고의 응답은 마음을 열고 같은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우리 내적 양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유향은 무엇입니까? 유향 연기가 주님을 향해 피어오르듯, 간절한 우리 희망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의 욕구가 기도를 자극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성과와 결과를 내놓고 자신의 신앙 정도를 판단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품고 있는 갈망과 희망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의지를 보시는 것이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경직되고 어두운 우리 모습까지 모두 받아 주십니다. 그분은 이런 모든 사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주님은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빛과 생명과 자유에로 이끌어 내시는 가장 소중한 우리 희망인 것입니다. 나 자신의 됨됨이를 모두 품고 받아 주시고 사랑하시는 분과 깊은 내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희망인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몰약은 무엇입니까? 몰약은 우리 삶에 따라오는 상처와 고통을 가리키지만 또한 상처를 치유하는 약초입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함께 계시는 주님께 우리 상처와 고통을 내어드림으로써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았고 고통 받으셨기에 그 처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부르짖어 보기도 합니다. 극심한 고통과 고독과 버림받은 상황 속에서 탄원해 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확신과 믿음 안에서, 상처와 고통으로 우리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아기 예수님께 동방 박사들이 무릎을 꿇고 경배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나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시는지, 나는 내 삶 속에서 어떤 선물을 주님께 봉헌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점차 변화되는 자신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인간 본래 모습을 찾고 그렇게 돼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다면, 우리도 삶의 증거를 통해 주님을 나타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최고 선물일 것입니다.
-홍 승모 신부-
강론 : 정 월 기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성탄축일에 우리는 한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 생명은 자라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축일에 우리는 태어난 그 어린 생명을 영접하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의 이야기는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記事)가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것은, 하느님을 알려줄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외면하면서 거부하였고, 먼 이역(異域)에서 사람들이 찾아 와 그분을 영접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활동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서 더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박사라는 사람들이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확히 몇 명이며 어디서 왔는지, 무엇 하는 사람인지, 베들레헴에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등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들, 어느 하나도 복음서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났다 그들의 배역을 마치고 사라지는 배우와 같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말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물이 셋이라서, 기원 후 500 년경에 발생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자, 즉시 놀라고, 그분에 대해 적의를 품었다는 말입니다. 헤로데는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주문을 하면서 그들을 베틀레헴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 베틀레헴에서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말씀은 이스라엘 안에 주어졌지만, 길을 묻고, 찾는 사람이 말씀을 만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마태오복음서의 의도가 보입니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모두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좇기도 하면서 갑니다. 돈과 권력을 좇아, 어떤 때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도 하고, 이웃을 외면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숨결, 곧 그분의 생명과 연대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진흙, 곧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계시게 살아야 하는 인간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의 구유를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여행은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여정(旅程)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말씀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흔하디흔한 별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였고, 회의(懷疑)에 빠져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이 준비한 정성을 바치고, 우리의 시야에서 그들은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하고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겠다는 마음과 그것을 좇아 떠나겠다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 꾸며주는 온상에서 하느님의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여 우월하게 살겠다는 마음에는 말씀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한 아기의 연약한 모습으로 누워 있습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 길을 가는 우리가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초라하고 고통당하는 약한 이웃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초라한 사람들이 있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의 현실에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보살핌의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그 보살핌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기심과 헛된 망상(妄想)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하고 고통스런 약자의 모습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인도하는 별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헤로데와 율사들 같이, 오늘의 종교 혹은 정치 지도자들이 하는 엉뚱한 주문이나,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한 맺힌 외침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그 숨결로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 사는 이기심과 무관심의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시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필 때, 하느님은 우리 실천의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 안에 ‘흙과 먼지’의 허무를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자기 안에 살아 있게 살겠다는 신앙인입니다. 말씀과 숨결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셔야 합니다. 우리를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귀한 선물은 우리 자신입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에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합니다. 이시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 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에게도 주님께 진정한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자기의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것을 놓으면 자유를 얻을 것인데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립니다. 먼저 주면 잃을 것이 없는데 주지 않으려 하니까 결국은 누가 빼앗지 않아도 빼앗긴 기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헤로데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헤로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입니다. 백성들의 놀란 것은 저 소리를 들은 헤로데가 어찌 나올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기 말고 다른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를 위한 전쟁에 큰 공을 세워서 기원전 47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대성전도 짓고 세금정책도 잘 세워서 백성을 위했습니다. 자기 개인 사치품을 팔아서 백성의 식량도 사들이고 하였는데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부터 의심증이 생기고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결국 말년에 가서 폭군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인 미리암도 죽이고, 장모 알렉산드라도, 장남 안티파테르도 다 죽였습니다. 장남의 두 아들도 그리고 10명의 부인에게서 난 아들들 중에도 왕권을 탐낸다 싶으면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1,15)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야고4,2)라고 말합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욕심은 그나마 지금처지의 행복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술에 만취한 베드로가 한참 비틀비틀 걷다가 전봇대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더니 전봇대를 잡고 서너 바퀴 빙빙 맴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전봇대에 기대어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습니다. “큰일 났군,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렸어!”
살다 보면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욕심이 그 길을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헤로데는 천년만년 권력을 잡을 줄 알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없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것을 움켜잡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동방의 이방인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멀리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불렀습니다)은 믿음이 있었기에 먼 길을 마다 않고 주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혹 예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내가 바치면 예물이고, 남이 바치면 뇌물이랍니다. 감사해서 그저 고마워서 바치면 예물이고, 조건이 붙으면 뇌물입니다. 주님, 이것을 해 주시면 제가 이것을 꼭 하겠습니다. 이것은 뇌물이지요. 우리가 봉헌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물을 봉헌해야지 뇌물을 바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동방 박사들은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첫번째 예물은 황금입니다. 황금은 왕권을 말합니다. 당신을 왕으로 모셔 순종하고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두번째의 예물은 유향입니다.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합니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불사불멸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황금을 예물로 드려야 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성화의 모습으로 유향을, 또한 불사불멸에 대한,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삶을 몰약의 예물로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에 하나를 제시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예비자 인도를 통해 그 믿음을 증거하기 바랍니다. 영생에로 인도된 기쁨은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기쁨이 커집니다. 그러므로 예비자를 인도하시고 인도된 사람이 꼭 영세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열매 맺는 기쁨을 차지 하기를 희망합니다.
한 사람이 한명을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잠시 예비자로 인도할 한 사람을 기억하실까요?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게 위해서는 우리가 이 지역사회에서 더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은 앞서는데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빛나게 하는 가운데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각자가 봉헌하는 예비자를 기꺼이 받아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한 왕의 부탁보다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더 중요하게 받아드려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내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삶의 방향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손길을 꼭 잡으시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분 위에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나타나기 바랍니다.(이사60,2)
사랑합니다.

그분께 기쁨 드리기로 약속해요
신앙에 입문한 많은 분들이 성경통독을 꿈꿉니다. 신앙생활 중에 말씀에 목말라 성경 읽기에 도전하는 분도 많으십니다. 그런데 성경의 두툼한 두께에 지레 겁을 먹기 일쑤입니다. 더러 구약에 비해서 짧고 단락도 짤막짤막 나뉜 신약성경부터 읽기 시작하라고 권고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만만해 보이는 마태오 복음서는 첫 장부터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생소한 가문과 이름들이 지루하게 나열되어 있어 읽어 가는 일이 수월치 않습니다. 재미없습니다.
성경이 이구동성으로 수면제라는 평을 듣고, 모르는 사람들의 족보 이야기로 폄하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완독의 '꿈'을 미루고 맙니다. 분주한 세상에서 한 주일에 한 번, 미사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귀동냥하는 것으로 만족해 버립니다. 그런 까닭에 소위 많이 팔리고 널리 읽힌다고 소문난 베스트셀러 성경은 마태오 복음서의 첫 부분만 뒤적여지다 '서가 장식품'으로 전락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받아 적으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때와 장소에 따라서 듣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 단순하고 적절한 표현으로 명료하게 아버지의 말씀을 들려주셨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차후에 성경을 기록한 제자들의 전언에서 그들이 얼마나 깊이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 경청했었는지를 절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만' 했던 그들이 그토록 뚜렷한 주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억해 낸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분의 마음까지 속 깊이 헤아려 표현한 사실이 기이합니다. 이야말로 성경이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1테살 2,13)을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1베드 1,21)이라는 증거라 믿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하는 신비의 책이라는 증거임을 확신하도록 합니다(1코린 2,13 참조).
아울러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새겨듣는 정성이 있다면 우리도 모두 그분들처럼 온 세상 만물에 아로새겨진 하느님의 사랑을 볼 것이며, 느껴 변화될 것이란 약속을 캐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성경이 곧 주님의 고백임을 깨달아 영혼에 깊이 새겨 읽으며 마음 모아 듣기를 간절히 권하신 것이라 듣습니다.
딱 잘라 마태오 복음서를 제대로 읽어낸다면 마태오 사도의 의중을 살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된 하느님의 뜻에 감복하게 될 것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 말씀이 영혼에 다디 달아 '말씀의 중독자'가 될 것임을 단언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속속 느끼고 깨달아 화답하며, 참회하여 새로워지기를 미루지 않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그분의 뜻에 동조하는 거침없이 복음적인 삶을 살아내는 믿음인이 될 것으로 의심치 않습니다.
새해 첫 주일입니다. 교회는 주님공현대축일을 지내며 성탄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감사의 한 주간을 보냅니다. 언제나 그분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신 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위하여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요?
이번 성탄에 듣고서 제 기쁨이 폭주했던 이야기가 있어 들려드립니다.
"어느 날 구유 속에 모셔진 아기 예수님이 감쪽같이 사라졌더랍니다. 모두들 놀라 찾고 있었는데 성당 마당에서 어떤 아이가 자신의 세발자전거에 예수님을 태우고 있었대요.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이 소원했던 세발자전거를 갖게 되면 꼭 예수님을 제일 먼저 태워드리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라 하더래요…."
저는 그날 아기 예수님의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란 천사들이 뽕뽕뽕 하늘에 구멍을 뚫고서 그 모습을 구경했을 것만 같았습니다. 새해, 우리 모두가 그분과의 약속을 지켜서 온 땅에 그분의 웃음소리가 가득해지길 희망해 봅니다. 올 한 해, '주님과 약속한 일'을 꼭 실천하는 우리이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