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나누어 주어라. (루카 3,10-18)

2012. 12. 16. 오전 7:54:06

글자


2012 1216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신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신앙 행위이다.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특별 헌금을 통하여 자선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선이라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곧 오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며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립시다.

 

 

군중이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3,10-18)

 


 12/16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장미주일)

 

    97구원의 메시아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예루살렘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이며, 예루살렘은 환성을 올리며 기뻐할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선포하면서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라고 당부한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생활이 근심과 걱정을 이겨 내게 한다(제2독서). 군중과 세리들과 군사들은 요한 세례자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낮추며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실 것이라고 말한다(복음).

☆☆☆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기뻐해야 한다. 두려움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기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1독서). 기쁨은 은총이다. 주님께서 주셔야 참기쁨에 닿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은총 안에 살아가면 늘 기뻐할 수 있다. 걱정한다고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걱정은 습관일 뿐이다. 감사와 기쁨의 생활이 걱정을 극복하게 한다(2독서). 요한은 자선을 가르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라는 것이다. 세리들에게는 속이지 말라고 한다. 군인들에게는 빼앗지 말라고 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요한은 이야기한 것이다. 자선은 어렵지 않다. 실행이 어려울 뿐이다. 위대한 요한이건만 주님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바실리오 성인은 나눔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먹지 않는 빵은 굶주린 사람들의 빵이고, 너희의 옷장에 걸어 둔 입지 않는 옷은 헐벗은 사람들의 옷이다. 너희가 신지 않는 신은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의 신이고, 너희가 금고에 깊이 넣어 둔 돈은 가난한 사람들의 돈이다. 너희가 실천하지 않은 자선 행위는 너희가 범하게 되는 수많은 불의(不義)이다.”
성인의 이 말씀은 저의 폐부를 아프게 찌릅니다. 옷장을 열어 보면 일 년 동안 입지 않고 보관만 해 온 옷들이 많고, 책장을 바라보면 읽지 않고 먼지만 쌓여 있는 책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제 지갑의 두께는 두툼합니다. 생각해 보니, 한 해 동안 땀 흘리는 일 별로 없는 가운데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자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가세요.”, “서로 사랑하세요.” 하면서 제 자신을 속였습니다. 이제 중독이 되어서 그런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마비된 것 같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은 실천에서 완성이 된다고 하였는데(2,14-26 참조), 실천에 이르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저의 믿음은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한 해를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늘입니다.

 

 

  ☆☆☆ ☆☆☆

자선주일 담화문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오늘은 모든 신자가 가난한 이웃을 향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구세주 예수님을 합당하게 맞이할 채비를 차리게 하기 위해 제정한 자선 주일입니다. 스물아홉 번째 자선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참다운 자선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2.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 성장을 통해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었지만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확대되고 있고, 미국에 이은 유럽의 경제 악화로 우리나라의 경제 현실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은 바로 가난한 이웃들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끼니를 걱정하고 한 몸 누울 곳을 걱정하며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가는 이웃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권은 물론 각계각층에서 ‘보편적 복지’를 중심으로 복지 논쟁이 한창입니다. 이제 복지는 더 이상 정책을 책임진 이들이 선의로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모든 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논의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교회는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보편적 복지와 관련하여 무엇을 어떻게 나누고 실천해야 하는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국가가 보편적 복지를 실천한다 하더라도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요한 23세 교황께서는 “교회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초 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약자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전통적으로 모든 신자가 자선을 실천하도록 끊임없이 독려해 왔으며,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다양한 자선 사업을 전개해 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종교적 자선 행위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앙 행위이며,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보여 주는 사회의 약자들을 향한 자선은 단순히 선행을 권고하는 차원을 넘어 가톨릭교회가 지닌 사회적 책임을 표명하고, 개인과 사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공동체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세상에 제시하는 역할을 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사회적 약자의 존재 자체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불평등의 결과임을 인식하고 이러한 불평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음을 선포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4. 자선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이며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참사랑 안에서 행하는 자선은 자신의 삶과 신앙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합니다.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합니다. 또한 자선은 속죄의 길(토빗 12,9; 루카 3,7-11 참조)이며,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길(신명 15,7-11; 잠언 22,9; 루카 14,12-14 참조)이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길(마태 19,16-21; 25,34-40; 로마 2,7; 갈라 6,7-10 참조)입니다. 이렇게 자선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선 행위를 옥새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아끼십니다(집회 17,22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적극적으로 자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값싼 동정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참다운 자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자유와 품위를 존중하면서 겸손하게 실천해야 합니다(마태 6,3-4 참조).

오늘의 현실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9-37 참조)을 많이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의 눈으로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마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사랑의 발걸음으로 다가가 아낌없이 가진 바를 나눕시다. 사랑을 향해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맙시다. 그리하여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줍시다(루카 10,36-37 참조).
대림 시기는 우리 가운데 힘없고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은혜로운 때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을 맞이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참다운 자선임을 깨닫고 그 준비를 잘할 수 있도록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 1,3).
2012년 12월 16일, 자선 주일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김운회 주교

 

<잘 나가던 시절>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축구시합 때 나름대로 열심히 뛰는 선수, 그라운드에 적응도 되어 시원한 골도 넣고 기가 살아 펄펄 나는 선수를 감독이 교체하겠다면 참으로 억울할 것입니다. 


벤치로 돌아오는 선수는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아이들 표현대로 꼭지가 돌아버릴 것이며, 괜히 애꿎은 쓰레기통이나 물통만 발길질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무렵, 세례자 요한의 인생은 그야말로 황금기였습니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적극 추종하는 유능한 제자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고, 수많은 추종자들의 수효는 언제라도 정치 세력화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영주 헤로데 마저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장 잘 나가던 시절, 끗발 좋던 시절, 메시아께서 도래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물러 나야할 때가 왔음을 직감합니다. 


즉시 오랜 기간 공들여 갈고 닦은 자신의 지역구를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또 자기 뒤에 오시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겸손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가장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 소나기 골을 마구 터트릴 수 있는 절정기의 순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멤버체인지가 됩니다. 일말의 아쉬움이나 아무런 미련도 없이 말입니다.


때가 왔음을 알게 된 세례자 요한은 망설이는 법이 없습니다. 확실하게도 뒤로 물러섭니다.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감춥니다. 주님께서 확실하게 뜨도록, 주님께서 활짝 꽃피어나도록 철저하게도 자신을 낮춥니다.

 세례자 요한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런 그의 겸손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매일 나 자신이 조금씩 사라지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매일 나 자신이 죽길 바랍니다. 나 자신이 사라지고 죽은 그 자리에 주님께서 현존하시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점점 성장해나가길 기원합니다.

 

  

 의인(義人) 안에 태어나시는 주님
-
구요비 신부- 

         

늘은 전례력으로‘장미주일’이어서 사제의 제의색은 연분홍 장밋빛으로 1년 중 가장 화사하고 아름답습니다. 장미는‘기쁨’을 상징하니 말씀의 전례 안에서 메아리치는‘기쁨’과 상통합니다.

성경 안에서 기쁨은 먼저 하느님 안에서 용솟음치는 기쁨입니다(필리 4,4). 불어성경은 제1독서를‘주님은 축제의 날처럼 기쁨으로 환성 올리며 너를 위하여 춤을 추시리라! ’(스바 3,18) 로 표현합니다. 동방 교회의 한 교부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며 하느님의 내적 생명 안에 순환운동(perichoresis)이 있다고 통찰하셨는데, 이 단어는 희랍어로‘윤무(􃡸舞)’혹은‘둥글게 춤추다’에 해당하는 perichoreuo와 통한다고 합니다.

성경 원문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과 더불어 춤추시며 당신의 신적 생명인 기쁨을 통교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과의 만남에 가슴 설레이며 기뻐하십니다. 사실‘기쁨’이란 우리가 혼용하는 즐거움, 쾌락과는 달리 인간이 높은 정신적인 상태에서 맛보는 행복을 뜻하는말입니다.“ 인간은보다 높은 능력의 단계에서 자기가 알고 소망하는 선(善)을 소유했을 때에 평온과 만족을 느끼며, 그런 기쁨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른다. 이 행복에는 다소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상한

표현이 기쁨이며, 엄밀히 말하면 이 또한 행복을 가리킨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불변하는 최고선(最高善)으로 알고 소망하는 하느님을 인간 이성으로 깨달을 때 그는 영적 기쁨 또는 영적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토마스아퀴나스).

이렇듯이 하느님의 생명인 기쁨은 온 누리에 용약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가까이 계신 이 주님이 내 안에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 각자 안에 주님의 태어나심이 가능할까요?

주님은 의인(義人) 안에서 탄생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볼때 더욱 그러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과 모습은 의인의 전형(典型)입니다. 제가 사목하면서 비신자들로부터 들어온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들의 전통적인 좋은 이미지는‘좀 고지식하지만, 강직하고, 정직한 사람, 법 없이도 사는 사람’입니다. 이점이 오늘 복음의 의로운 삶과 밀접히 연결되지

않을까요? 군중과 세리와 군인들의 한결같은 질문인‘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요한의 답변은 시종일관 정의(正義)로운 삶입니다(11절-14절).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正義)를 말한다면 곧바로 인간의불의와 죄를 엄격하게 벌하시는 무서운 심판관인 하느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이 계시하는 하느님의정의는 이와 반대로 하느님 자신이 당신의 의로움(義)을 인간에게 내려주시고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인간의 죄와 불의를 속량해 주시는 구속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6절).

하느님은 정의를 실천하며 살려는 사람들 안에서 탄생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배광하신부-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뻐하십시오
옛날 금슬이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두 분은 적적할 때면 아이들처럼 술래잡기를 하셨습니다. 어느날 할머니가 술래가 되고 할아버지는 숨으셨는데, 할머니가 한참을 찾다가 항아리 속에 숨어있는 할아버지를 찾아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 숨었소? 영감”“그리 숨었소?”“크리숨었스”“크리스마스”크리스마스를 부르게된 어원이라고 합니다??? 오늘 사도 성 바오로는 성탄의 기쁨을 앞둔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분부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4)
우리는 복음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우리는 기쁨을 살아야 합니다. 기쁨을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기쁨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사의 고달픈 일들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떤 이들은 긍정적으로 잘 받아들여 기쁨으로 승화시키고, 어떤 이들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주고 남들에게도 상처를 주어 절망을 살게끔 만듭니다. 기왕에 받아들여야 한다면 진정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라는 말이 있듯 웃는 이들을 미워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찡그린 얼굴로 불평불만하며 살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네 삶에서 짜증이 나고 분이 치밀어 오르는 경우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옵니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의 뜻도 사람과 사람 사이입니다. 우리는 어떻든 모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였던‘최재천’교수는 당신의 책<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서문에 이 같은 글을 썼습니다.
“어떨 때는 정말 우리가 동물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위선의 탈을 벗고 지극히 동물적으로 살아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울화가 치밀 때가 언뜻 언뜻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소박한 신념이 하나 있습니다. ‘알면 사랑한다’는 믿음입니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미워하고 시기한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돌에 맞아 싼 사람도 왜 그런 일을 저질러야만 했는지를 알고 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 심성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분명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모두에게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보이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즐거워하십시오
어떤 할머니께서 장날 장에 가셨는데, 웬 젊은 남자가 할머니 뒤를 따라오며, “같이 가 처녀!”라고 외치더랍니다. 할머니는 민망해서, “저 젊은 놈이 이 늙은이에게 웬 처녀…”하며 종종걸음을 걸으시는데, 그 젊은이는 계속 따라오며 “같이가 처녀!”를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부끄러워 빨리 걷던 할머니가 귀에 걸은 보청기를 제대로 끼었더니 그 젊은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갈치가 천 원!”이라고요…??? 이 같은 멋진 글이 있습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희로애락의 인생이지만 고단한 삶 한가운데에서도 끝없이 우리네 삶이 기쁨인 까닭은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분명 기쁨을 우리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를 오늘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렇듯 분명히 밝힙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스바 3,17)
우리는 분명 아기 예수님, 우리의 승리자이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겪게 될 온갖 시련과 고통을 아시기에 또다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승리의 임금이신 주님께서 또다시 우리에게 오십니다. 슬프고 외롭고 맥이 다 빠져버린, 비참하고 억눌린 가련한 우리에게 또다시 힘과 용기와 희망과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때문에 우리는 우울할 수가 없습니다.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슬퍼하며 좌절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진정 기쁨을 살아야 하고 그 기쁨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세리와 군사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4)
오늘 우리 또한 이 같은 질문에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진정 기쁨의 성탄을 목전에 둔 우리는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3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대림3주일을 자선주일로 지내기로 정하였습니다. 이날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기회를 갖습니다. 이 시간 자선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달 어느 날, 저녁미사를 시작하려는 시간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미사가 시작되니 기다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젊은 부부가 4살 박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큰 아이는 보육원에 맡기고 이렇게 일자리를 찾아 떠돈다는 것이었습니다. 4살 된 아이도 맡길 수만 있다면 맡기고 싶다고 하면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잠자리를 준비하고, 아이를 맡길 곳을 이리저리 알아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금일봉을 주고 보냈습니다. 다음 날 다시 연락을 취할 것을 부탁하고는 점퍼와 목도리를 둘러 주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음날 옆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확인해 보니 제가 만난 분이 틀림없었습니다. 밥을 사주고 여관에서 잠을 재우고 돈을 얼마 쥐어 보냈지만 이대로 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 청주지역의 성당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신부를 속이는 것인지, 신부들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지? 어찌되었든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나진 못하더라도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선의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신부가 이럴 때 곤란함을 느낍니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고, 이래 속고, 저래 속고. 그래도 때가 되면 깨우칠 날이 오겠지? 나를 속여먹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여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42).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그렇습니다. ‘축복해 주는 이는 자기도 흡족해 지고, 마실 물을 주는 이는 자신도 흠뻑 마시게 됩니다’(잠언11,25). 받기위해 준다면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지혜롭게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고 미사 봉헌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당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이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오늘 복음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3,8)고 한 요한에게 군중이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세리도, 군인들도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옷을 두벌가진 이는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다른 이와 나눠야’ 하며, 세리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 것’이며 군인들도 ‘갈취하지 말고 자신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되 베푸는 삶,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을 잘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계명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신명기 30,11-13)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4). 그런데 마음과 몸이 따로 이고 실천하지 않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당에 오시면서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수시로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이 묻거나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칩니다. 저도 거울을 자주 봅니다. 앞이 훤하잖아요? 흰머리라도 좋다 빠지지만 말아다오! 어느 분이 머리 염색약을 슬며시 가져 다 놓으셨는데 발라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더 빠지잖아요. 지금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어찌 되었든 아마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디에 비춰봅니까? 거울에 비춰보면 보입니까? 우리 영혼의 상태를 거울에 비춰보면 그 상태를 낱낱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를 비춰보는 거울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야고보서 1장21절 이하에 보면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쳐야지요. 왜 고치지 않습니까?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 답을 가르쳐 주었는데 왜 그대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그대로 하면 축복이 주어지는데, 행복해지는데 왜 그대로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느냐 말입니다. 그 사람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무엇이 묻은 것을 확인하고도 그냥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바보입니다. 가진 것을 ,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하는 말씀을 듣고도 왜 그냥 넘어갑니까?

오늘 2독서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피4,6-7).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찰떡궁합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은 너무 예뻐!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아요!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옳아! 그러니까 우리는 찰떡 궁합이야!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용하게도 알아맞히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주님과 찰떡궁합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매번 지적하고 명하지 않아도 그분 뜻을 먼저 알아듣고 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들며 무엇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깨우치길 바랍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임금에게 직언을 했습니다. “저의 조언이 임금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지도 모릅니다”(다니4,24).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자기 영광을 떨치려고 하다가 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제 정신을 차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높이 찬양했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진실하고 그 길은 다 공정하니 그분께서는 교만 속에 걷는 자들을 낮추실 수 있는 분이다”(다니4,34). 기억하십시오. 선을 행하면 죄를 벗고 가난한 이를 도우면 허물을 벗습니다.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 됩니다. ‘인정이 많고 동정 어려 남에게 꾸어주며 모든 일을 양심으로 처리하는 사람,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겠고 영원히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되리라’(시편37,25-26). 그러므로 “너희는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줄 때에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 일 때문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대는 모든 것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15,10).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암브로오시오 성인은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누구든지 자선을 베풀면 그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도 자선을 하면 영벌을 면하게 됩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적은 것에도 만족하시니 많고 적음을 떠나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선을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국 자선은 이웃을 구체적으로 돕는 행위이지만 내 자신의 영생을 보장 받는 것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 베드로 클리솔로그). 그러므로 이웃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시고 동시에 영생의 복을 오늘로부터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어느날 놀부 집에 스님께서 시주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코웃음을 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눈을 감고 불경을 외었습니다. 네가 나를 외면 해도 나는 너에게 복을 빌어주마 하고 가나봐라 가나봐라 가나봐라. 이 소리를 듣고 있던 놀부가 질세라 주나봐라, 주나봐라. 주나봐라 하였답니다. 지나가던 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잘해봐라 잘해봐라 잘해봐라”했습니다. 마침 고승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왠만하면 주지그래. 왠만하면 주지그래. 왠만하면 주지그래” 하였답니다. 

“자비는 결코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하늘에서부터 저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내릴 뿐이다.

자비는 두 번 축복을 내린다.
한 번은 자비를 주는 사람에게
또 한 번은 자비를 받는 사람에게

그러나 자비가
정의의 이름으로 둔갑될 때,
세상의 권능이 하느님의 권능처럼 착갈될 때가 있다.
비록 당신이 정의를 갈망할지라도,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 속에서는
아무도 구원을 볼 수 없음을 늘 기억하라.
우리는 자비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비를 가르치기 위해
자비로운 행동을 보여 줘야만 한다.-셰익스피어-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민첩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주십시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일복음강론

목록 전체보기 →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요한 1,1-18)12.12.25조회 59대림4주일. 말씀을 믿으신 분!”(루카 1,39-45)12.12.23조회 60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나누어 주어라. (루카 3,10-18)12.12.16조회 592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회개촉구(루카 3,1-6)12.12.09조회 61대림 제1주일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25-28.34-36)12.12.02조회 58연중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주간) - 요한 18,33ㄴ-3712.11.25조회 1,300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 마르코 13,24-3212.11.18조회 272연중 제32주일-과부의 헌금 (마르 12,38-44)12.11.11조회 57연중 제31주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12,28ㄱㄷ-34)12.11.04조회 57연중 제30주일/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10,46ㄴ-52)12.10.27조회 962012년 10월 21일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12.10.21조회 56‘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김영남 신부12.10.12조회 5810월 7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 마르코10,2-1612.10.08조회 57+ 9월 30일 주일 한가위 - 루카 12,15-21 +12.09.30조회 103연중 제23주일/귀먹은 사람은 듣게 하시고.(마르코 7,31-37 )12.09.08조회 81연중 제22주일/영혼이 깨끗한 사람들12.09.04조회 1,226피아골에서 온 편지 - 강길웅 세례자 요한 신부님의 고별 강론12.09.03조회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