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일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39-45)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
would be fulfilled.
말씀의 초대
베들레헴은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곳이다. 그러나 미카 예언자는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러 오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모든 이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제2독서).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으로 찾아간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에 사로잡혀 마리아에게 축복의 말을 전한다(복음).
☆☆☆
미카 예언자는 구세주의 출현이 베들레헴에서 있을 것이라고 한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본디 이 지역은 다윗과 연관된 곳이었다. 하지만 차츰 메시아께서 태어나실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오셨다.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으로 인류는 구원되었다. 이제 황소나 염소의 피를 바치는 구약의 제사는 수정되어야 한다(제2독서). 마리아께서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신다. 그녀 역시 천사를 통해 기적의 아이를 갖게 된 여인이다. 두 분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에 감탄하고 있다. 그분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 행복임을 보여 주고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이가 없던 늙은 부부에게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기적 같은 출생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인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이’라는 말은 요한의 출생 배경에 걸맞습니다. 이 이름은 요한이 앞으로 선포할 복음의 은총, 특히 그 은총을 세상에 내려 주실 주님을 가리킵니다.
즈카르야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웃들은 아기에게 어떤 이름이 주어질지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이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름을 받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요한의 탄생이 회개로 이끌어,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었다면, 이제 죽을 운명의 인간을 살리신 주님의 탄생이 곧 이어질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 묻는 말이 있습니다. “아기가 누굴 닮았어? 엄마야, 아빠야?” 그런데 요한이 태어나자 사람들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합니다(루카 1,66 참조). “누굴 닮았어?”라는 질문은 과거의 일이고, “이 아기가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미래의 일입니다.
요한은 앞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주님께 세례를 줄 것이며, 불의를 일삼는 권력자의 폭력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은 서서히 작아짐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될 것입니다.
☆☆☆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아기를 못 낳던 여인에서 ‘기적의 잉태’를 체험한 여인으로 바뀐 분입니다. 천사를 만났던 두 분이었으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에는 두려움이 자리하지 않습니다. 두 분은 ‘희망과 사랑’의 주님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없었는지요? ‘이것은 분명 기적이다.’ 이렇게 느꼈던 ‘사건과 만남’은 없었는지요?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깊이 들어와 계십니다. 대림 시기 네 번째 주일은 이러한 고백을 하는 날입니다. 그리하여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날입니다.
성탄의 아기 예수님께서는 구유에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의 마음에 ‘먼저’ 오십니다. 내 마음에 ‘오신 주님’을 깨닫지 못하면, ‘구유의 예수님’은 주님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쳐다봐도 ‘거룩한 장식’으로 보일 뿐입니다.
희망과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희망하며 사는 이에게는 더 엄청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묵상
아이가 없던 늙은 부부에게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기적 같은 출생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인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이’라는 말은 요한의 출생 배경에 걸맞습니다. 이 이름은 요한이 앞으로 선포할 복음의 은총, 특히 그 은총을 세상에 내려 주실 주님을 가리킵니다.
즈카르야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웃들은 아기에게 어떤 이름이 주어질지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이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름을 받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요한의 탄생이 회개로 이끌어,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었다면, 이제 죽을 운명의 인간을 살리신 주님의 탄생이 곧 이어질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 묻는 말이 있습니다. “아기가 누굴 닮았어? 엄마야, 아빠야?” 그런데 요한이 태어나자 사람들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합니다(루카 1,66 참조). “누굴 닮았어?”라는 질문은 과거의 일이고, “이 아기가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미래의 일입니다.
요한은 앞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주님께 세례를 줄 것이며, 불의를 일삼는 권력자의 폭력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은 서서히 작아짐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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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아기를 못 낳던 여인에서 ‘기적의 잉태’를 체험한 여인으로 바뀐 분입니다. 천사를 만났던 두 분이었으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에는 두려움이 자리하지 않습니다. 두 분은 ‘희망과 사랑’의 주님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없었는지요? ‘이것은 분명 기적이다.’ 이렇게 느꼈던 ‘사건과 만남’은 없었는지요?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깊이 들어와 계십니다. 대림 시기 네 번째 주일은 이러한 고백을 하는 날입니다. 그리하여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날입니다.
성탄의 아기 예수님께서는 구유에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의 마음에 ‘먼저’ 오십니다. 내 마음에 ‘오신 주님’을 깨닫지 못하면, ‘구유의 예수님’은 주님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쳐다봐도 ‘거룩한 장식’으로 보일 뿐입니다.
희망과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희망하며 사는 이에게는 더 엄청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서, 우리는…
-안병철신부-
오 늘 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문안하는 내용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복음의 핵심은 그러한 사건 자체를 전해주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다윗이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사건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2사무 6,2-11). 구약에서는 계약의 궤란 것이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제 당신 백성 한가운데 현존하시기 위해 몸소 사람이 되어 오십니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하심 아래서 이루어지는 이 엄청난 사건이야말로 바로 우리 앞에 놀라운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가 개막됨을 알
려주는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하기 위한 기다림 속에서 대림절의 시간을 살아왔고 이제 그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역사의 희망찬 첫 순간을 온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합니까?
다양한 형태의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극적인 폭력이 더 이상 우리의 행복
을 앗아가지 않는 그런 평화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간절한 소망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토록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어
리석게도 아니면 의도적으로 평화를 해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불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라는 미명아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믿는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 말하면서도 그분을 독점하려는 이기적인 모습을 우리 안에서 찾아보는 것 역시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이율배반적이라 말할 수 있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행하면서도 인간이라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자기변명에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것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실 때 자신의 임무가 끝났음을 알고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과거의 자리를 내어준 것이지요. 엘리사벳은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며 모든 이에게 희망의 강력한 불빛을 던져주실 메시아의 오심을 깨닫고 기쁨 속에서 맞이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 그리고 그의 태중에 있던 요한, 그들은 주님의 오심을 깨닫고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자들입니까?
과연 우리는 성탄을 준비하면서 낡은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대는 가고 새로운 희망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지요? 아니 느껴보려는 노력이라도 하고 있는지요?
성탄의 의미를 충만히 살 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지금이라도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__
믿음
-양승국 신부-
마리아의 생애는 우리가 상본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화려한 왕비의 생활이 결코 아니었습니다.그 무정하고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기진맥진했던 시골 처녀가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견뎌내기에 너무도 벅찼던 마리아는 아인카림에 사는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나자렛에서 도보로 사흘이나 걸리는 먼 여행이었습니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힘겨웠지만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보다 훨씬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리아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언약의 말씀을 들었지만 어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던 마리아였기에 늘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확증을 통해 마리아는 다시금 힘과 용기를 내게 됩니다. 엄청난 하느님의 초대에 앞뒤 따지지 않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던 마리아, 그저 ‘일어서라’ 하시면 일어섰고, ‘길을 떠나라’ 하시면 길을 떠났습니다.
‘믿어라’고 하시니 그저 믿었습니다. 믿는다는 것, 우리가 알다시피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입니까? 마리아는 예수님 잉태 사건을 통해 믿는다는 것이 일생일대를 건 하나의 투쟁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믿음의 길이란 때로 피가 흐르는 가시밭길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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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다른 사람 없소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한없이 주고 싶어서 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 아들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랑을 체험케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마리아라는 한 인간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이 시간 믿음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성탄 준비를 다 하셨습니까? 트리를 만들고 구유장식을 하였고, 카드를 보내고 선물 준비를 했다고 성탄준비가 끝났다고 할 수 있나요? 아직도 마음 안에 시기, 질투, 미움, 원한을 품은채로 이기적이고 자만심이 가득 찬 채로인데....그 안에 예수님께서 편안히 머무실 수 있을까요? 열심히 일을 했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했는데...희생, 봉사, 사랑의 실천에 소홀하였는데 어떻게 그 안에 주님께서 기쁘게 거처하실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외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보다 맑고 깨끗이 정돈된 마음, 죄악으로부터 해방된 마음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 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쳤습니다.(히브11,17)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번제물을 바치러 산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들 이사악이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물음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데 아들이 그 제물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차마 ‘제물은 바로 너다’ 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을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그 자리에서 체험케 되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주님께서는 롯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천사들을 통해 그 가족들의 살길을 알려줍니다. 롯의 사위들은 그 소리를 우습게 여겼고, 천사들은 결국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했습니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19,17).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퍼부어졌고 온 성읍들과 온 들판들이 땅 위에 자란 모든 것들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19,26). 돌아보지 말라고 했으면 돌아보지 말아야죠. 왜 돌아봅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살려주신다고 길을 알려주었는데 그대로 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서 벌을 내렸다고 원망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민수기 21장4절 이하에는 구리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대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서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21,5) 그러자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어 그것들이 백성들을 물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죽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뱀을 치워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자 주님께서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놓았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21,9)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게 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죽음 역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한 젊은이가 산에 올랐다가 어둠을 맞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내려가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벼랑아래로 미끄러졌습니다.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위에 누구 없소? 누가 날 좀 구해줘요! 하며 소리쳤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를 구해주리라.” 젊은이는 이제 살았구나! 하며 “당신이 거기 계시니 정말 기쁩니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네가 잡고 있는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젊은이가 긴장하며 “그렇지만… 하느님..…” 주저하는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를 믿느냐?” 그러자 젊은이가 “예, 하느님, 당신을 믿습니다. 제가 당신을 믿기 때문에 매주 성당에도 나가고 성경공부도 하고 매일 기도시간도 가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다면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어라.”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었는데 젊은이가 아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기 누구 다른 사람 없소?”
주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 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를 알면서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대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종에게는 주인에 대한 의무만 있을 뿐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을 자처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잉태하게 되었고 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말한 대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에”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은 성모님을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이기 때문에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9)
믿음은 이리저리 계산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때 상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 행하지는 않으면서 능력을 먼저 보려고 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 바를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2독서 히브리서 10장 9절의 말씀대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왔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노력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1코린 15,58)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 주님의 탄생을 가져왔듯이 이제 우리의 믿음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 예수님을 낳아드려야겠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만큼 우리 모두가 믿음의 사람,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정이건 직장이건 어디에 서 있든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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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 마을에 스스로 자기자신을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그 아이도 선물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착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선물을 못 받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나만 못 받으면 왕따가 되는 데….” 그러다가 예수님께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앞으로 착한 아이가 될 테니 선물을 꼭 보내주세요!” 그렇지만 싸우거나, 거짓말을 안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쓰던 편지를 찢어 버리고 성당으로 갔습니다. 성당을 한참 돌아보다 작은 성모님상을 훔쳐 달아나서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 예수! 내 말을 잘 들어라. 협박용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지금 내가 네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있다. 그러니 네 어머니를 살리고 싶거든 24시간 이내에 선물을 보내라. 선물을 보낼 장소는 000이다.”
우리는 때때로 믿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고 협박하고, 흥정하고 달라고 떼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르11,24) 라고 말씀하시지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번 성탄의 아기예수님께 드리는 선물은 빛의 삶을 사는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 되어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님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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