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 10,2-16<또는 10,2-12>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 줍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혼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의 마음을 일깨워 주시길 바랍니다. (군인주일을 맞아 기도와 더불어 물질적 후원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시자, 아담이 너무 마음에 들어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2,23)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제 아내를 저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것 아니냐?”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담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 착하게 만드셨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아껴줄 것이 아니냐!”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가만히 보면 쟤가 좀 맹한 데가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하고 아담이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애를 사랑할 거 아니냐?”
하느님께서 창조의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바로 남자만으로도 그리고 여자만으로도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각각 나름대로 아름답고 독특한 개성이 있지만 자기 혼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고, 반드시 상대방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났어도 모자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남녀의 관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유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줘야 할 동반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 하겠습니까? 우리는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니며 서로 존경하고 사랑 받아야 할 고유한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나 피조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서로 나를 위한 맹한 것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10,7)라고 혼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의 요건을 보면 먼저 “떠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통해 오늘의 내가 되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부모에게 의지 않고 자기 짝을 만나 독립된 자기 생활을 위해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다 큰 자식이 자기 생활도 감당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손을 벌인다든지 얹혀사는 것은 불효이며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부모도 자식을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 비관하는 어르신도 계신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독립해서 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에게 큰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서로 “떠나야 할 때 떠나고,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떠남은 자기 짝과의 결합을 위한 것입니다. 혼인 서약을 보면 “나 000은 당신을 내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계약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별히 괴로울 때, 아플 때가 그렇습니다. 그때 참 사랑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계약의 충실성이 드러납니다. 계약의 충실성 안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두 사람이 가꾸어가야 할 과제이며 의무입니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줌으로써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사람을 만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배우자를 “거들 짝”(창세2,18)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둘 짝을 만나는 것이 혼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비로소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자녀의 출산과 교육의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가 살아온 삶의 양식이 달랐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통계를 보면 결혼을 해서 부모를 떠나는 기분이 남자는 1.책임감이 앞선다(27%). 2.자랑스럽다(18.9%). 3.어른이 된 느낌(16.2%) 4. 기타 (37.9%)의 순입니다. 그에 비해 여자는 1.섭섭하다(41.9%) 2.어른이 된 느낌(16.1%) 3.책임감이 앞선다(12.9%) 4.기타29.1%)로 조사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고려하는 사항을 보면 남자는 1.성격(27.3%) 2.외모(22.8%). 3.가정환경(21.4%) 4.사회적지위(16.5%) 5. 종교(12%). 그리고 여자는 1.사회적 지위(25.6%) 2.성격(24.2) 3.가정환경(19.3%). 4.외모15.7%) 5.종교(15.2%)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고 합니다. 반면 “여자는 결혼할 때가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에 있어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지 못할 때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일방적인 자기 요구만을 강요하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서로 ‘너와 나는 이것이 틀리다’ 고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었으면 죽기까지 그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서로의 짝을 만나게 해 준 것은 하느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맺어주신 혼인을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어르신들이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 시집가면 그 집의 귀신이 되라.” 이 말씀은 혼인을 했으면 절대로 갈라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짝을 만나는 것을 인연 이라고 하는 데 인연은 우연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만나 서로의 구원을 위해 이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상대를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도 하지만 상대를 위한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통해서 나도 구원을 얻게 되고 상대방도 구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은 신중해야 하며 신의와 사랑이 없는 혼인은 해서도 안 되며 하더라도 원인 무효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엮어진 이상 사랑을 더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5,25).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듯 순종해야 합니다”(에페5,22.33). 결국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충실하여 행복한 날 이루시길 빕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 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면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야 하고 일상 안에서 그 사랑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 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62,5).
하느님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이웃 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청춘 남녀의 데이트에 관한 얘기 입니다.
1.미모가 확실한 남자와 여자가 데이트를 하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환상적이다”.
2.못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가 데이트를 하면 “저 청년은 보기보다 능력이 있구나!”
3.잘생긴 남자와 못생긴 여자가 데이트를 하면 “저 여자는 돈이 많은가 보다”!
4.못생긴 남자와 못생긴 여자가 데이트를 하면 “두 사람은 정말 사랑하나보다” 한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작품을 “보시니 참 좋다” 고 하셨습니다. 더더욱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환상의 커플,능력의 커플, 사랑의 커플이 아니라 몸과 마음,영혼이 온전히 하나되어 환상의 커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이혼, 그 뜨거운 감자>
한집 혹은 두세 집 걸러 이혼가정이 생겨나는 ‘꽤 심각한’ 우리 사회 현실 앞에 ‘죽어도 이혼만큼은 안 된다’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신자들도 밥 먹듯이 어기는 상황 속에서 구색만 갖춰놓은 교회법처럼 여겨져 씁쓸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왜 끝까지 강경하게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를 고집하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까요?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는 바로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을 바탕으로 한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이혼은 가능하다’는 유다 이혼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혼인 관련 율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입니다.
흐트러진 백성들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바로잡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윤리질서의 회복을 위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쇄신을 위해 단행하신 예수님의 혁신 작업이 바로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의 설정이었습니다.
혼인을 통해서 부부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라고 강조하십니다. 결혼한 두 사람이 갈라선다는 것은 한 육체를 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리하고 부자연스런 일임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선언하십니다. 언제나 흔들리고 유한한 인간이 제정한 것이라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파기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불멸의 것입니다. 그것을 파괴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시고 선포하신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이기에 우리 가톨릭교회는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구체적인 현실, 세태, 상황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가정과 혼인’을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늘 소년원이나 분류심사원, 교도소를 찾아다니고, 가출 비행 청소년들을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은연중에 제 머릿속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고착화되더군요.
부모의 불화, 별거, 이혼=자녀들의 고통, 방황, 일탈행위, 비행
그래서 제가 쓴 글도 부모의 이혼은 곧 자녀들의 비행과 직결되니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부모가 참으라는 식의 내용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얼마 후, 몇몇 분들의 피드백을 받았는데,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억지스런 논리로 상처 입은 분들께 정말 죄송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도 좁은 안목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이혼했다고 가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혼가정 청소년이 다 비행청소년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이혼했지만, 자녀들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더 훌륭하게 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었습니다.
언제나 부족한 인간이다 보니 누구나 다 판단착오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루어지지 말았어야할 잘못된 결혼도 고려해 볼 수 있겠습니다.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한 평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지옥과도 같은 하루하루인데, 어떻게 한 평생을 참겠습니까?
다양한 케이스들을 접하면서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각 개별인간들이 겪고 있는 말 못한 사정들, 고통들, 어쩔 수 없는 상황들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 그리스도 신자된 도리로써 목숨을 걸고 실천하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미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교회 차원에서의 진지한 사목적 배려가 필요하겠습니다. 이혼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교회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목적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혼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모든 가정과 구성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주님 안에서 다시금 빨리 추스르고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시길 청합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10월 7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 마르코10,2-16<또는 1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