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루카 1장 39-56절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 나라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를 기리는 의무 축일이다. 성모 승천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의 신비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지상 생활을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부르심을 받아 오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된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우리 자신을 맡깁시다. 또한 성모님께 우리 민족을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하며 정성을 모아 미사를 봉헌합시다.


교회는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을 복되신 동정녀와 동일시해 왔다. 열두 개의 별은 교회의 열두 사도를 가리키며 아기는 예수님이시다. 붉은 용은 악의 세력인 사탄을 나타낸다. 교회는 이 사탄과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를 거둘 것이다(제1독서 묵시록 11,19; 12,1-10).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죽음이 왔듯이, 부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로 모든 이가 구원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제2독서 코린1서 15,20-27).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는 유다 산골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신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시라고 외친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바치신다( 루카복음 1,39-56).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류는 놀라운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발달된 과학 기술을 사람을 죽이고 문명을 파괴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그 가운데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이 같은 참상은 인간이 하느님을 잊고 자신의 힘과 재주만을 과신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인류의 미래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판단과 능력에는 늘 한계가 있다는 점을 잘 아셨습니다. 성모님의 온전한 의탁은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다는 것을 믿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엘리사벳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성모님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많이 배워서, 가진 것이 많아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저울로 인간의 행위를 측량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곧, 인간의 저울로 재면 권세 있고 부유한 이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저울로 재면 굶주리고 비천하게 살지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로움입니다. 인류의 평화와 구원은 하느님의 정의로움을 믿고 살아갈 때 찾아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이 점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에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성모님도 그 생애의 마지막에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믿음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승천이라는 표현은 하늘과 땅과 지옥, 세 층으로 된 우주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통용되던 용어입니다. 우주 공간까지 탐사하는 오늘의 인류는 우주가 세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성모님이 그 생애 종말에 하느님에게 가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믿음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 4세기에 벌써 교회 안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마리아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는 믿음입니다.
신약성서는 성모님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들이 알리고자 하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초기 신앙인들이 갖게 된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고를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은 마리아는 즉시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도 그 방문에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요한을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라 믿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 소식을 요한이 제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장면에는 기쁨과 찬양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기쁨과 축복과 찬양을 발생시킨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는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서 그 집회에서 부르던 것입니다. 그 노래는 구약성서에서 발췌한 문장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를 집필한 사람이 그것을 가져와 마리아가 부른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바꾼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 부리는 이와 부요한 이가 있고, 비천한 이와 굶주리는 이가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는 내용입니다. 그 자비 안에서는 인간이 만든 차별, 우월감, 권세, 독선, 비굴함 등이 모두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한 구원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복음서를 기록한 동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갖게 된 믿음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모님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알리는 데에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언급들 중에 역사적 사실 자체가 중요하여 보도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예수가 정신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어머니와 집안 식구들이 놀라서 그를 찾아 나선 이야기일 것입니다(마르 3, 21-35).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가족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젊은 나이로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그 어머니가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으리라는 사실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마리아에 대한 복음서의 언급들은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하여 보도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아들의 일에 늘 깊이 참여합니다. 이 사실 때문에 복음서들은 마리아를 신앙인의 모범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의 탄생 예고를 듣고,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2, 38)라고 말하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가나 촌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에게 물을 술로 바꿀 것을 암시하는 마리아(요한 2, 1-12)는 술이 떨어진 잔치와 같이 따분한 유대교를 보고, 예수님에게 희망을 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곁에 선 당신의 모친 마리아를 당신 제자와 모자(母子)의 인연을 맺어 준 이야기(요한 19, 25-27)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신앙인들은 그분 제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과의 유대를 유지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모님에 대한 복음서 이야기들은 초기 신앙인들의 처신 내지 모습을 알려주는 것들입니다.
오늘 축일은 마리아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그 모친 마리아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하느님 안에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축일이 제정된 것은 1950년 11월 1일입니다. 1945년에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5년이 지난 때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가 곳곳에 아직 늘려 있습니다. 20세기 들어와서 일어난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많은 생명이 무참하게 살상되고, 도시들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죽이고 파괴하는 인간의 힘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모두가 철저히 실감하였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인들끼리 서로 죽이며, 삶의 터전을 초토(焦土)화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선포된 땅에서 서로 미워하고, 죽이며, 파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독일인들이 600만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최대로 훼손되었고, 인류의 미래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버린 삶의 현장에서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말해야 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미워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천명해야 했습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우리 인간의 운명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자각하게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 많은 한국인들이 징병 혹은 징용으로 타향에 끌려가 죽었습니다. 정신대(挺身隊)라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그 후에 생긴 한국의 남북 분단은 수백만의 인구가 이산(離散)가족이 되어 아픔을 안고 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이오 전쟁은 이 땅에서 수백만의 생명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최근에도 천안함이 폭침되었고, 연평도가 포격을 당하였습니다. 이북의 동포들은 굶주리고, 강제 수용소의 비극은 아직도 계속됩니다. 이북의 정권이 보유한 핵무기와 미사일은 세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남한은 정치적, 사회적 갈등으로 찢어져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서나 인간의 자유는 증오와 혼란으로 쉽게 흐릅니다.
오늘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우리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 자비가 우리 실천의 기준, 우리 외침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고린 13, 1) ◆


<오직 예수님만을>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아침미사를 마치고 잠깐 마당으로 나섰는데, 잠시나마 참으로 특별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떠돌다가 저희 집에 정착한 슬기라는 고양이 녀석이 까치 한 마리에게 슬슬 쫓겨나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몸무게나 공격성이나 여러 면에서 게임이 안 되는 까치인데,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서 ‘깍깍’ 있는 힘을 다해 외치며 고양이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결사적인 까치의 공격 앞에 고양이는 슬슬 뒤꽁무니를 빼더군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잠시 뒤에 해답을 찾았습니다. 슬기라는 녀석이 까치집을 습격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 들어있던 부화 중이던 까치 알을 슬쩍해서 홀랑 까먹어버린 것입니다. 한 발 늦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너무나 황당했던 어미 까치는 그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슬기를 뒤 쫒아갔던 것입니다.
어미 새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끔씩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정말 극진한 모성입니다.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하고 나면 그 뒤로는 완전히 자신을 잊습니다. 하루 온 종일 목숨까지 걸어가며 새끼 새들을 먹여 살립니다. 혹시라도 침입자가 새끼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 역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이후의 삶,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앉은 성모님의 마음은 다른 어머니들보다 더욱 특별했을 것입니다. 더 조심스러웠고, 더 노심초사했고, 더욱 많은 신경을 쓰셨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날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순간 순간 지켜보신 성모님, 혹시라도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유년시절, 시절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헤로데의 유아 박해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로 피난까지 갔습니다. 잠잠해지니 또 다른 터전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이사’하면 깝깝한 생각이 먼저 드는데, 그때 당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해 여러 번 터전을 옮겨야 했던 성모님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늘 묵묵히 아기 예수님을 위해 엄마로서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에 늘 계셨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응했습니다. 잠시도 떨어져있지 않고 예수님 주변만을 맴돌며,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연구하고, 예수님만을 관상했던 예수님의 사람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성모님의 삶이 힘들기만 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내 팔에 앉았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 직접 젖을 먹였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내 손으로 키웠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내 도움에 힘입어 무럭무럭 성장해나갔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십자가 아래 서계시는 참혹함과 돌아가신 예수님을 당신 팔로 앉는 괴로움도 겪으셨지만, 고통보다는 기쁨이, 시련보다는 축복이 훨씬 많았던 성모님의 생애였습니다.
오늘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정말 큽니다.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지금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어머님으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숱한 성인성녀들과 함께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를 보거라. 그저 예라고 대답하고, 그저 묵묵히 견뎌내며, 늘 예수님 주변을 떠나지 않고, 그분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 얼굴을 관상하며, 그렇게 살아온 내 얼굴을 바라 보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