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루카 1,57-66.80

2012. 6. 24. 오전 7:32:46

글자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루카 1,57-66.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배터리가 다 닳아져 가는데도>



    돌아보면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수도회 연례피정이나 세미나에 참석하면 당연히 공동침실을 사용했었고, 또 식사시간만 되면 어떻게 해서든 어르신들이 계시는 메인테이블에 안 앉으려고 하고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어디 모임에만 갔다하면 늘 독방신세이고, 초기 양성자들은 어떻게 하면 제 옆자리에 안 앉으려고 기를 씁니다.


    이 말은 저도 슬슬 한 물가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이제 슬슬 노년에 대해서 신경을 쓸 때가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자주 죽음에 대해서 생각도 해봅니다. 어떻게 죽어야 잘 죽나? 자주 생각합니다.


    ‘노년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직면해야할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입니다. 사회인들에게 있어 그 정답은 너무나 확연합니다.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그 나름대로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부부생활의 영속성은 행복한가? 불행한가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노인들의 뇌리 속에는 경제력 있고 효심 지극한 자녀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과 독립성은 노년기 행복의 중요한 척도입니다. 건강 여부 역시 노인들에게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행, 불행의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심신이 모두 건강한 노인,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행복한 삶의 기준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자기초월의 길을 걷고 계시는 분들이지요. 비록 늦었지만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깨달은 분들, 그래서 그 깨달음에 투신하는 분들의 모습 참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지나온 인생을 조용히 되짚어보면서 비록 늦었지만 자기 정화의 길을 시작하는 분들, 비록 험난한 여정이지만 영적 쇄신의 길을 시작하는 노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우리의 노년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가 비록 노년의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무대 뒤로 물러서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이미 충만한 영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무대 뒤로 사라짐이 결코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란 존재가 점점 작아지고 예수님이 점점 커지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기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추는 일, 영적인 눈을 뜨는 일, 그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입니다. 배터리가 다 닳아져 가는데도, 이 세상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철저하게도 육적으로만 사는 분들, 철저하게도 세속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 세상을 초탈하려는 분들 앞에는 새 세상이 펼쳐집니다. 주어지는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목숨 걸고 싸울 일도 없습니다. 편안해집니다. 소화도 잘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 안에서 세상 것들로부터 이탈해서 주님을 향해 영적 여행을 시작하는 전환점을 마련하는 인생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생이며 의미 있고 새로운 인생이며, 영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한때 빗나갔던 우리 자신의 인생을 겸손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떤 원인으로 인해 방향이 틀어졌는지 철저하게도 자신의 인생을 분석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시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확실하게 영적인 삶에로의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길 기원합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노년을 위하여>


    아름답고 향기로운 노인이 되고 싶다.

    젊었을 때의 그 순수함과 다감한 마음씨를 간직했으면...

    점점 더 심해지는 아집과 집착, 그리고 편견 같은 것을 버렸으면...

    아흔아홉 가지의 만족함을 팽개치고,

    한 가지의 부족함에 목매는 어리석음도 놓아버렸으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으로,

    하느님에게는 당신에 대한 그리운 가슴으로 살아가는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속에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되어

    여름철 뜨거운 햇볕을 막아 주고

    사람들이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늘이고 싶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0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죽음의 의미


세례자 요한은 구약 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 탄생과 생애와 죽음이 예수의 전형(前型)이라 할 수 있다.
요한은 자신 의 백성을 만들지 않고 모든 이를 예수께로 인도했다.
참으로 모든 신앙인이 가야 할 모범이시다.

1.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예수 탄생의 전주곡이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리고 오래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일출을 알리는 새벽빛처럼 오신 분이다.
오랜 침묵의 기다림,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며 참고 기다려 온 밤의 끝자락에서 동트는 해와 같이 오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열강들의 쉴 새 없는 세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참으로 고달프게 살아왔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할 그 때에도 로마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며 메시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예언자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마 태3,4)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여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마태3,2)외치자 백성들의 시선은 일제히 요한에게로 쏠렸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야 그분이 오시는가 보다"하며 긴긴 기다림의 한(恨)이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요한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희망이었다.


2. 요한은 자신의 백성을 만들지 않았다.
가뭄에 단비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눈 이 번쩍 뜨일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마태3,5-6)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다.(마태3,3,13이하)
그만큼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 가끔 등장했던 가짜 메시아들은 "나를 따르라"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를 메시아로 알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 나보다 훌륭한 분이 내 뒤 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르1,7-8)고 선언하였다.

남의 입에 들어간 것도 빼앗아 먹으려고 혈안이 된 듯한 세상에서, 자기를 메시아로 여기며 모여드는 백성들을 그대로 예수님께로 돌려보내기란 분명 쉽고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세례자 요 한은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지 않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한 것이다.

'사람들 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일', 사목 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두고 "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세례자 요한을 격찬하셨다.


3. 예언자는 죽음으로 말한다.
그러나 세례자 요 한의 죽음(마르6,14-29참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예수님이 그렇게 극찬한 대 예언 자 세례자 요한은 시숙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사는 여자 헤로디아의 욕심과 원한의 희생물로 어이없이 죽고 만다.

딸의 춤사위를 보고 기분이 좋아 딸에게 내 뱉은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마르6,22-23)는 한마디 의 허풍 가득한 맹세. 이 기회를 놓칠세라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시켜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가져다 주십시오."(마르6,23)하고 청한다.
참으로 기쁨을 나누는 생일날에, 초청한 귀빈 들 앞에서, 그것도 어린 딸을 시켜 청할 수는 없는 끔찍하고 사악한 발상이 아닌가?
그러나 왕은 그 헌신짝 같은 맹세를 지켜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고 만다.
어찌 하느님 의 예언자가 이렇게 파리 목숨처럼 죽을 수 있단 말인가 ?
'이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종으로 열심 하게 살았다면, 죽음을 맞을 그 순간에는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가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람, 대 예언자가 이렇게 개죽음을 하다니!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가끔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가 ?"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묵상해 봐야 한다.
예언자 중의 대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어떠했는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르15,34)하며 인간들뿐 아 니라, 하느님께로 부터도 버림받은 것 같은 극도의 고독 중에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은 결코 평화와 위로 가득한 가운데 숨을 거두시지 않았다.
링컨도, 마르틴 루터 킹도, 마하트마 간디도 모두 괴한이 쏜 총탄에 맞아 비명에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한다.
예언자는 언제 나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세상에 외친다.
그러나 예언자의 가장 힘 있는 외침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울려 퍼진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외치다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할 때 진 정한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고, 그 정의를 외치다 죽음을 당했기에 참 예언자가 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언자의 사명을 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못지않게 '무엇을 위해 죽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축일에 깨닫자. ♡


◆  유 영봉 야고보 신부 ◆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일복음강론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