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주간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 한 주간을 말한다. 성주간의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주님 부활을 맞이하도록 이끌어 준다. 교회의 전례에서 성주간은 전례의 정점을 이룬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 전에 성지를 축복하고 행렬을 한다. 미사 때에는 긴 수난 복음을 듣는다. 성주간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특별한 예식이 없다.
성목요일 오전에 각 교구에서는 교구장 주교의 주례로 교구 사제들이 다 함께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한다. 이 미사 중에 사제들의 서약 갱신이 있다. ‘재의 수요일’에 시작한 사순 시기는 성목요일 저녁에 봉헌되는 ‘주님 만찬 미사’ 직전에 끝난다.
저녁에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주님 만찬 미사’가 봉헌된다. 이 미사 중에 ‘발 씻김 예식’이 있다. 미사가 끝나면 성체를 수난 감실로 옮기고 제대포를 벗기며 제단 중앙에 있는 십자가도 치우거나 천으로 가린다. 신자들은 수난 감실에 모신 성체 앞에서 밤을 새워 조배하며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한다.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되며, 이때부터 ‘예수 부활 대축일’ 저녁 기도 때까지를 ‘파스카 성삼일’이라고 한다.
+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15, 1─39
2012년 4월 1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마르코 14,1─15,47)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아무 죄가 없으면서도 모욕과 수모를 받는 ‘주님의 종’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은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주님의 뜻을 따른다(제1독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낮추시고 십자가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시어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시려는 것이다(복음).
이 미사의 3개 독서는 다 봉독하는 것이 좋지만, 때에 따라서 독서 가운데 하나를 빼거나 둘을 다 빼고 수난기만을 봉독할 수 있다. 그러나 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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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파스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묻기 시작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사실 유다만이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단의 대표인 베드로는 자신에게 위기가 닥치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이해관계에 맞으면 두 손 들어 예수님을 환호했고, 그러지 않으면 옳고 그름을 떠나 등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철저히 배반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홀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은 더없이 고독하고 괴로운 길이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상대방의 생각이 내 뜻과 맞지 않으면 등을 돌립니다. 내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친구는 하루아침에 원수가 됩니다. 폭력과 죽음의 문화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는 생각조차 하기 귀찮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는 아니겠지?’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의 잘못과 죄로 주님을 배반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주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는 은총의 성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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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갈등을 안고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웬만해서는 작은 갈등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외칩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비관하고, 하느님께 항의하기도 합니다.
물론 힘겨운 갈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이 그런 갈등 속에 빠져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갈등 역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크고 깊은’ 갈등이라면 그만큼 ‘크고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누구나 갈등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누구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갑니다. 수난 복음 역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알리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휘청’거리셨습니다. 힘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힘들지 않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고통스럽지 않는 갈등은 없습니다. 크고 무겁더라도 작고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총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자신이 ‘모르는 마음’이 있습니다. 억울하게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달리 생각할 수 있건만 억울한 쪽으로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에 연관된 사람을 떠올리며 벽을 쌓습니다. 언젠가 보복할 것이라는 생각마저 합니다. 무서운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은총이 오게 해야 합니다. 선한 생각이 햇볕처럼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성주간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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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한 사람일수록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니 계시다면 이러한 불의와 불공평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시지 않다면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게 하셨다면, 그 뒤에 뭔가 그보다 더 큰 것을 마련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사랑하는 자녀를 일부러 고생스러운 일에 내맡기는 아버지들을 더러 볼 수 있습니다.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고통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마르 11,1-11; 마태 21,1-11 ; 루카 19,28-38 ; 요한 12,12-19)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성주간의 첫째 날이다. 전례는 사순 시기의 분위기와 뚜렷이 대조된다. 성지를 축복하고 행렬을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한다. 이는 그리스도 임금의 개선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날 거행하는 성지 축복과 행렬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와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한 데서 비롯한다. 이 행사는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 서방 교회에 널리 전파되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전례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주님을 우리의 임금님으로 모시게 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 수난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며 우리가 겪는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주님 수난 성주간 첫날인 성지주일 아침에,
저는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이 한 말이 자꾸만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셨다." 라고 했는데 그는 뭘 보고 그랬을까?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은 저 예수가 울부짖으며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바타니?"~하며 숨을 거뒀는데 말이다.
오늘 복음의 첫머리에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아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시는 장면(14,3)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여자들도 있었지요.
예수님은 평소에 소외되고 당시에 버림받은 계층들과 함께 그들의 아픔과 동참했어요.
그들의 아픔을 치료하고 병을 고쳐주며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기득권을 가진 종교와 정치의 합작아래 어쩌면 미운 오리새끼인냥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리는 겁니다.
죄목도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
빈정대는 죄목이지요.
자칭 왕이라고 고치라고 까지 했쟌아요?
그렇게 죽어간 한 죄수를 두고 왜 백인 대장은 그가 진정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을까?...............
저는 이렇게 묵상해 봅니다.
왜? 내가 정치범이냐? 내가 뭘 잘못했냐?
저놈들이 그랬지 내가 야냐?~~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은게 솔질한 나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마디도 원망을 안 하시네요. 다만 아버지께 간구하시며~
아버지께만 매달리시네요. "엘로이 ! 엘로이! "~~~
성경에는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15,37)라고 합니다.
저도 잠시 그 상황으로 함께 해 봅니다.
함께 부르짖어 봅니다. 내 심령안에서 큰소리로요.
"엘로이 ! 엘로이! "~~~
레위기 1장에 보면 번제물에 관한 대목이 나옵니다.
번제물이란 속죄 제물로서 하느님께 모두 살라 바치는 제사이지요.
남김없이 싸그리 태웁니다. 국물도 없지요.
저는 '올인'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제물로 바칠때
분명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올인'했어요.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올인'하고 계십니다.
그럼 나는?~~~~~
뭘로 '올인'할 수 있을까.
말로만 주님뜻대로 하세요. 합니다.
아~~로마노 언제쯤 주님 앞에 철이 들려느냐....
다시금 뇌까리며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함께 외쳐 봅니다.
"엘로이 ! 엘로이! "~~~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16,15-16)
아멘. 아멘. 아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 마르코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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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굶주리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채근담) 이 사람의 약점 중 하나입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으면 좋겠는데 인간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에 올라앉으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습니다. 그리고는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11,1-10). 정말 군중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마르15,1). 빌라도는 군중에게 “여러분이 유다인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그러자 유다인들은 거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르15,13). 빌라도가 다시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하고 묻자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15,14) 하고 외쳤습니다. 환영하던 마음은 어디 가고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말만하고 있는지가슴이 아픕니다. 유다인의 명절인 과월절 기간에, 로마 총독이 정치범 한사람을 놓아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절 특별사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선동에 많은군중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습니다(요한15,15). 소신 있게 판결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중의 목소리에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소위 여론정치요, 인기정치였습니다. 이제 수석사제들도 율법학자들도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15,31-32)하며 예수님을 더욱 조롱했습니다. 모욕과 조롱을 일삼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켕기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떳떳하고 당당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림이 없고 그저 침묵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켕기는 것이 있으면 더 큰 소리를 내며 변명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주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일상 안에서 나를 모함하고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침묵하며 기다릴 수 있을까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라고 엉뚱한 구설 수에 오르게 될 때 묵묵히 소문을 낸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도 회개해야 하고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으련만 도리어 발길로 채이고 맙니다. 사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멀리 안보이면 괜찮은데 늘 가까이에서 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이 드는 만큼 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힘든 상황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마르15,34)하시며 더 간절히 아버지의 뜻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거기에 서 있던 백인 대장이 그분이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셨다”(마르15,38) 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정체를 모두가 안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여인들이 그분의 임종을 지켜 드렸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으신 주님을 알아본 사람은 복됩니다. 그리고 임종을 지킨 여인들도 주님의 임종을 지켰으니 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주님을 지킨 이들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끝까지 주님을 지켜야겠습니다. 믿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백인대장처럼 늦게나마 주님의 정체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배신의 삶은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농담 삼아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배신자’라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도 일상 안에서도 결코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 이번 한 주간은 성주간입니다. 거룩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성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을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설정해 주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던 세족례를 행하고 성찬례를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낮에는 성유축성 미사를 봉헌합니다. 성금요일에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오후3시경에 십자가 길을 하고 저녁에는 십자가 경배예절을 합니다. 성토요일 부활을 준비하는 날 입니다.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기에 토요일 밤부터 주일 새벽에 걸쳐 빛의 예식과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한 주간 특별히 주님의 부활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 왔습니다. 일상 안에서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기쁨이 커질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희생, 봉헌이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밑거름이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