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4일 사순 제2주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코 9,2-10)
말씀의 초대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완전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복을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제1독서/창22,1-2.9ㄱ.10-13.15-1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다.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를 단죄할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제2독서/로마8,31ㄴ-3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로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다. 그러나 부활은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서 얻게 되는 영광이다(마르9,2-10).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심하게 논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예수님께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했을 것입니다. 논쟁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 셋을 따로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산으로 올라간 세 제자는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눈이 부시게 변화되신 것을 보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조상들과 맺으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은 이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더 이상 다른 증거와 표징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까지도 하느님 손에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영광스럽게 변모시키셨습니다. 이처럼 변화는 하느님의 손에 내어 맡길 때 찾아옵니다. 우리의 내적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변화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느님께 맡겨 드릴 때 우리의 가치관과 삶이 바뀌게 됩니다. 하느님 때문에 변화된 삶, 그것이 신앙인이 받게 되는 영광입니다.
☆☆☆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가십니다. 그러시고는 ‘하늘 나라에서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 자리엔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황홀경에 빠집니다. 베드로는 초막을 짓고 오래 머물자고 합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요? 우선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두려움보다 기쁨과 환희가 더 큰 놀람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희열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을 오랫동안 화려하고 근엄한 모습으로만 상상했습니다. 천상의 빛이 감싸기에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모습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만 했다면 어떻게 가까이 갈 수 있을는지요? 제자들은 한순간 깨달았던 것입니다. 스승님의 본모습이 편안한 모습이며, 아무나 바라볼 수 있는 모습이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주시기만 하는 모습이며,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요구를 해도 사랑으로 받아 주시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발견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확신을 안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들은 평생 이 체험을 지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실 때에도 ‘이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변모 사건은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사랑의 사건입니다.
☆☆☆
창세기가 전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와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를 연결해서 이해하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귀한 아들 이사악의 봉헌은 막으시면서도 당신의 귀한 아들은 인간을 위해 기꺼이 내놓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지극한 인간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인간 사랑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내맡기십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드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분의 모습이 변하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모시고 살겠다고 제안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제안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어서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변명도 해줍니다. 복음서는 이 이야기로써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사실(史實)만을 알려주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신앙인들이 그분에 대해 가졌던 믿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문서입니다. 그 문서는 우리도 그것을 읽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권합니다.
^^^ *강론*^^^
오늘의 복음이 언급하는 높은 산,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것, 옷이 빛나고 흰 것,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 등은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말할 때, 이미 사용한 표상(表象)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구약성서의 이런 표현들을 가져와 이야기를 꾸민 것은 예수님 안에 제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닮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켰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에 대해 깨달아서 이스라엘 신앙의 시조(始祖)가 된 분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만으로써 설명이 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닮은 분이지만, 그것만으로 예수님을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보태어 고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깨닫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하느님이 세상의 권력자인 왕 파라오와 함께 계시지 않고, 천대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도하여, 이집트에서 대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그 거사(擧事)의 성공은 하느님이 과연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주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이런 해방과 구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사람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분”(탈출 33,19)으로 체험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행하신 일들이 과거 모세가 깨달은 하느님,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으며,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고, 죄책감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그들이 자유롭게 또 보람 있게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도 실천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하느님에 대한 말이 왜곡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인물입니다.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원초의 체험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왕과 사제들은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치부하고, 대우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의 횡포에 맞서서 그들을 비판하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선포한 사람들이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과거 예언자들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시대 기득권자인 율사와 사제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절대적인 것으로 강조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을 은폐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심판하실 무서운 하느님을 말하면서, 그들도 남을 심판하는 높은 신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 어깨에 지우고 그들 자신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고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율법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자각하고,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성전이 사람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그것들은 하느님을 알리지 못하고 사람에게 짐스런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체험하고 가르친 하느님을 깊이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과거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는 데에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고, 그분의 일, 곧 하느님 나라의 일을 실천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그분의 일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자기 자신을 더 내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군림하려 하지 않고, 섬기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실제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자유 안에 하느님을 살아 계시게 하는 운동입니다. 나 한 사람 잘되기 위해 쓰라는 나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동물이 지닌 자유입니다. 인간에게 그런 자유는 이기적인 아집(我執)이라 일컬어집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혼탁하게 하는 것은 자기 한 사람, 혹은 자기가 속하는 집단을 위한 아집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득권자들의 오만방자한 횡포가 사회에도,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 읽어낸 자유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기적 아집을 벗어나,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072장 다볼 산의 예수 |
|---|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 반영억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시며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같은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주님께서 주신 아름다움(창세1,27)을 잘 지킬 수 있는 지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것이 참 좋았다”(창세1,31)고 하셨지만 그곳에서 찾지 않고 헛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따라서 새롭게 변화되어 아름다움을 가꾸기도 해야 하지만 먼저 내 자신이 아름다움자체라는 것을 일깨우고 그것을 지키고 가꾸려 노력해야 합니다. 결코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지 말고 내 삶을 그리고 삶의 터를 꽃자리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보면 욕심을 내고 갖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이 가장 값진 보석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큰 보석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주님의 말대로 하면 생명이 주어지고, 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본래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키워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그림이기때문입니다.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