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일/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5 )

2012. 2. 11. 오후 10:57:23

글자


  연중 제6주일 마르코 복음. 1,40-45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감상했을 영화 ‘벤허’(Ben-Hur)의 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나병에 걸린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 환자들과 함께 어느 동굴에서 마치 짐승처럼 모여 사는 처참한 모습을 담은 장면입니다.
그 모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아들을, 그리고 사랑하는 오빠를 만났지만, 얼굴을 마주하지도, 반갑게 포옹도 해 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숨어야 하는 기구한 모습이 영화에서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나병 환자들은 이렇게 소외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고통을 안고 살며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하는 나병 환자들에게, 예수님만은 그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다가가 손을 대시며 치유해 주십니다.
나병은 당연히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받는 천벌이라고 여겼던 당시 유다 사회의 통념을 무너뜨리고, 예수님만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 준 ‘하느님 사랑 얼굴’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본 자비와 사랑의 예수님 모습을 믿고 희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는 이런 하느님 사랑 속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그분의 모습을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 ☆ ......... ☆ ......... ☆ .............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 하늘과 땅 사이에 / 꽃과 나비가 /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 호적도 없이 /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 성한 사람이올시다.

오늘 복음에 나병 환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득 문둥이 시인이라고 불리는 한하운 시인의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이 시는 나병이라는 장애를 가진 시인이 세상의 편견과 멸시를 받고 목 메인 절규를 한 시입니다. 병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보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팔매질이 시인을 더욱 힘들게 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보시고 그를 가엾이 여기시고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나병 환자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병자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지닐 때 사회적 약자들의 한은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 ☆ ......... ☆ ......... ☆ .............

 

 

<나병환자 한 사람이>(마르1,40-45)

 -유 광수신부-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나병환자를 만난다. 우리는 이 나병환자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묵상하자. 나병환자란 어떤 병자인가? 의학이 많이 발전하였지만 나병은 지금도 완전 히 치유되지 않는다. 나병이 더 이상의 진행되지 않도록 하기는 해도 완전치유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나병에 걸리면 치유 불가능한 병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따라서 나병에 걸리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다. 나병이란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는 병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병 환자임에 틀림없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하루 하루 자고 나면 자고 나는 만큼 그만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죽음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라는 면에서 볼 때 나병환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 받을 수 있는가? 죽음이라는 거대한 강에서 구출될 수 있는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죽음의 행렬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는가? 그것을 우리는 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인간의 힘으로는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또한 그 누구도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죽음이 좋아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없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어떻게 하면 죽음의 거센 풍랑을 막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죽음의 행진에서 빠져 나와 생명의 대열로 들어설 수 있는가? 이 세상의 것으로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예외없이 다 죽음을 향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줄 수 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의 믿음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루 하루 나의 신앙생활은 점점 더 생명이 충만한 삶이어야 한다. 비록 육체는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늘 생명력으로 충만해져 있어야 한다. 믿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은 비록 나이를 먹어 육신은 늙어가고 힘이 없고 볼품없어도 영혼만은 늘 생기가 넘치고 새롭게 부활하고 생명이 충만해지고 더욱 사려 깊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것이다. 젊은이들보다도 더 진취적인 생각을 하고 늘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미래를 예언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식하고 똑똑한 사람들보다도 더 지혜롭고 따뜻하며 사랑이 넘치리라. 그것이 믿음이다. 매일 똑같은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죽음의 강물을 거술러 생명의 강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믿음은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함께 죽어 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육체가 늙는다 고해서 덩달아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젊어지고 하느님의 기운이 차고 넘쳐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로 육신의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무기력해지거나 의욕이 사라지거나 절망과 외로움과 고통 속에 살지 않는다.

 

보라! 마더 데레사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모습에서 죽음의 그늘을 볼 수 있는가? 비록 몸은 병들고 나약해졌지만 그네들의 영혼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을 끌어 않고 있으며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모든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오늘도 건재하고 계시며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그것이 믿음이다. 즉 죽음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요 날로 더욱 더 생명력으로 충만하고 지혜로워지며 덕스럽고 개방적인 인간이 되며 언제나 모든 이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발산시키는 사람이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죽음의 병에서 구출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병환자처럼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애원해야 한다. 믿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요, 상대방에게 목숨을 내맡기겠다는 것이요, 상대방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순명의 자세이다. 나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본 적이 있는가? 무릎을 꿇고 애원해 본 적이 있는가? 무릎을 꿇은 사람만이 받는 은혜가 있다. 우리가 믿음의 은혜를 충만히 받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만큼 우리의 믿음이 진지하지 못하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릎을 꿇고 애원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하기보다는 오늘 나병환자처럼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그분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을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강요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맡겨드리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스승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맡겨 드릴만큼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는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나병환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응답이다. 이 말씀은 나는 너보다 더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해주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죽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분은 나보다 더 예수님이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은 말씀의 능력을 말한다. 우리의 나병을 치유시켜 주는 것은 곧 말씀이시다. 우리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곧  말씀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고 말씀을 통하여 기쁨을 찾고 말씀을 통하여 총명해지고 지혜로워지며 말씀을 통하여 모든 이에게 전해줄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늘 생기 넘치고 주님을 찬양하는 영혼의 삶을 산다. 그래서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죄이다. 믿음이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를 용서받고 다시 깨끗해지는 것이다.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청하는 것이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져 다시 생명을 얻고 일어서는 것이다. 즉 말씀으로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 ☆ ......... ☆ ......... ☆ .............

 

마르 1,40-45. 레위 13,1-2,44-46.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 환자 한 사람을 낫게 한 이야기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분이 믿으셨던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그분의 믿음이 우리의 신앙이고, 그분이 아버지라 부른, 그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외아드님이 알려 주셨다.”(1,18). 같은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도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14,9).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손을 대며’ 그를 고쳐주십니다. 나병은 예나 오늘이나 법정(法定) 전염병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그들을 격리시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들을 격리시키는 시설들이 많이 있었고, 현재도 있습니다. 격리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그들을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격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거에는 병을 진단하는 방식도 과학적이 아니어서 피부가 불결하면, 나병환자로 취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에도 나병 환자는 마을에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불결! 불결!”하며 외쳐서 사람이 자기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병은 부정(不淨)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죄인, 곧 더러운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레위 13,44-46). 율법은 부정한 이들과 신체적 접촉을 금합니다. 접촉을 한 사람도 부정한 사람, 곧 죄인으로 취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면서 그 사람을 고친 다음, 사제에게 가서 보이고, 부정을 벗어나는 절차를 밟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교는 죄의 대가로 주어진 병이라 믿었기에, 치유 여부를 사제가 확인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환자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와 접촉하였고, 임의로 격리를 해제하였기에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병을 하늘이 내리신 벌, 곧 천형(天刑)이라 불렀습니다. 나병에 걸렸던 시인 한하운은 천형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이 병이 끔찍한 불행인 것은 하느님 혹은 하늘이 주신 벌이라고 말하면서 환자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소외시키고, 또 그 전염성으로 말미암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소외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위 시인의 말을 빌리면, 환자를 하느님도 사람도 없는, ‘하늘 밖에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를 가엾이 여겨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엾이 여기고, 그에게 손을 대면서 먼저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그를 사제에게 보내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합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하느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 등의 말씀을 복음서들은 전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당신이 부정한 인간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생명들도 있습니다. 선의의 사람이 짓밟히고, 고통을 겪는 반면, 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높은 지위와 재물을 누리기도 합니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 한 사람이 반드시 대우받는 세상이 아닙니다. 노력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던 사람이 더 대우받기도 합니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가사의한 일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마귀 들렸다는 사람들에서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면서도, 나병환자를 고쳐서 사회에 복귀시켰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주며,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구하는 일”, 곧 “선한 일”(마르 3,4)을 하며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돌아온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사야서가 말하는 ‘고통당하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그분 안에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앓는 병을 앓아주었으며,..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53,4-5.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그런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랑은 있어도 정의를 빙자한 분노는 없습니다. 그분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도 어울렸습니다. 그분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예수님이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죄에 속한 육의 모습으로”(8,3) 오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 안에 같은 친교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당신과의 친교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정의를 빙자한 우리의 분노는 인류공동체에서 우리를 분리하고, 우리 스스로를 높여서, 하느님으로 행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것은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요한 15,13)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른다.”고 요한의 첫째 편지(4,8)는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도, 우리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일에 대해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지, 보상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그대들은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시오.”(루가 17,10). ◆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일복음강론

목록 전체보기 →
사순 제1주일(마르 1, 12-15.)광야에서 유혹 받으시는 예수12.02.25조회 81[연중 제7주일]중풍병자치유(마르코 2,1-12).12.02.19조회 56연중 제6주일/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5 )12.02.11조회 592월 5일 연중 제5주일- (성녀 아가타 축일)마르코 1장 29-39절12.02.05조회 242장례미사 김 안나 2012 02 0212.02.03조회 56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1-28)12.01.29조회 53축복을 빌어주는 사람***설 (구정) 명절 미사 (루카12,35-40)12.01.24조회 58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연중 제3주일 2012년 1월 22일12.01.20조회 326연중23주일 정월기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 강론11.09.09조회 572011. 8. 21 (연중 제21주일) 정월기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 교중미사11.08.29조회 582011. 8. 15 (성모승천 대축일) 교중미사11.08.29조회 542011년 8월 14일 연중 제20주일 미사 강론11.08.29조회 542011. 8. 7 (연중 제19주일) 정월기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 강론11.08.10조회 542011. 7. 31 (연중 제18주일) 정월기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 강론11.08.07조회 527. 24 (연중 제17주일) 정월기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 교중미사강론11.07.26조회 532011. 7. 17 (연중 제16주일) 정월기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 교중미사강론11.07.24조회 56Re:2011년 5월 8일, 새성전 기공식(동영상)11.07.20조회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