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중풍병자치유(마르코 2,1-12).

2012. 2. 19. 오전 7:23:43

글자

[ 연중 제7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중풍 병자를 낫게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들것에 달아 예수님 앞에 내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믿음의 은혜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은 죄를 지어 하느님을 괴롭히고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제1독서이사야서 43,18-19.21-22.24ㄷ-25).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를 다시 방문하려고 하였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신자들은 바오로를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바오로는 자신이 코린토 교회의 방문 계획을 바꾼 것이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그들의 선익을 위해서라고 말한다(제2독서 코린토 2서 1,18-22).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시어 죄를 용서하는 권위가 당신 손에 있음을 선포하신다. 이를 본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충격을 받았으며, 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으로 고발한다(마르코복음 2,1-12).
 

*복음*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은혜로운 파스카 체험>

     은혜롭게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사랑의 파스카 체험’을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파스카’란 말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넘어가다’ ‘지나가다’ ‘건너가다’란 의미입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에 힘입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죄의 상태에서 용서로, 지긋지긋한 병고에서 치유에로 건너간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파스카를 체험한 원조는 아무래도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집마다 문설주와 상인방에 가축의 피를 발랐는데, 파괴자는 이스라엘 집안을 건너뛰게 되었습니다. 파라오를 비롯한 그의 신하들과 이집트인의 모든 가정에서는 졸지에 맏아들을 잃게 되어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음의 파괴자가 건너감(파스카)으로 인해 하느님의 재앙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탈출기 12장 참조)
 뿐만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인해 갈라진 홍해바다를 건넘을 통해 출애굽 사건이 완결됩니다. 이집트 군사들은 홍해바다에서 떼죽음을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자상한 배려에 의해 안전하게 갈라진 홍해바다를 건너감(파스카)을 통해 생명의 땅으로 올라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파스카 신비의 정점은 아무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파스카 신비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온전한 순명을 통한 이 세상의 구원이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간의 깊은 바닥 체험, 그리고 영광스런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 모든 인류에게는 참으로 특별한 선물 한 가지가 주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을 건너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 모두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물리치심으로 인해 그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사다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일,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 역시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은혜로운 파스카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꼼짝없이 누워 지낸 세월이 어언 수십 년이었습니다. 일어나지조차 못하는데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가족들에게 그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목숨이 붙어있다뿐이지 죽은 목숨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기나긴 죽음, 수십 년에 걸친 바닥체험을 해온 그에게 예수님은 파스카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말씀을 통해 오랜 세월 죽어있던 그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만듭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중풍병자는 자신 안에서 펼쳐진 파스카의 은총으로 인해 드디어 제대로 된 인생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참 사람이 되어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이 파스카 체험이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의 삶 안에도 파스카 체험을 통해 생명의 땅을 향한 건너감이 이루어지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의 파스카 체험이 중요합니다. 살아생전 제대로 된 죽음과 부활 체험이 우리 안에 이루어진다면 그에 따른 하느님의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가 우리 내면을 한번 훑고 지나가게 되면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살아생전 제대로 된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나면 삶은 또 얼마나 감사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다른 이들은 그냥 지나칠 작은 것들, 따스한 햇살, 신선한 공기, 한줄기 바람, 작은 풀꽃 한 송이가 그에게는 다 기적이요 축복이요 감사꺼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하느님의 벌이 아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을 알리는 문서들입니다. 예수님이 믿었던 하느님을 믿고 그분이 하신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전기를 기록하는 것 같이 기록되었지만,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보도하기보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 채로 떠메고 예수님에게 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집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병자를 예수님에게 내려 보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지붕을 쉽게 벗길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어렵게 그분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고, 넋을 잃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로 오늘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는, 놀라운 일을 하셨고, 사람들은 그 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입니다.

중풍병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상인으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최소한의 생존을 누리는, 위축된 생명의 소유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의 병을 고치기 전에 ‘그대는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교는 병을 인간 죄에 대해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벌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용서를 중풍병자에게 선언하신 것은 그 병이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았다고 생각하며, 위축되어 사는 사람을 예수는 그 선입견에서 해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쳤다는 복음서 이야기들은 병을 하느님의 벌이라고 주장하는 그 시대 유대교를 반박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행이 닥치면, 즉시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모르면, 하늘 혹은 하느님이 주신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의 진학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사업이 실패했을 때,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선고받았을 때, 신앙인들은 흔히 그 원인을 하느님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하느님에게 적용합니다. 우리 죄의 대가로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는 동네 성황당(城隍堂)에서 빌던 옛날 사람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를 지니고 삽니다. 세상의 생명체이기에 지닌 한계와 약점이 있습니다. 병고, 실패, 각종 장애, 죽음 등입니다.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살기에 발생하는 한계들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경쟁과 실패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신앙은 하느님의 힘으로 그런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려는 수작이 아닙니다. 그런 한계를 겪으면서도, 선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율사도 아니고, 사제도 아닙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싫어하고 미워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가로놓인 이 죽음의 한계를 치워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습입니다. 예수의 부활 이야기는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도 하느님은 과연 살리는 분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고 죽이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의 한계를 기적적으로 뛰어넘어, 독야청청(獨也靑靑)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인간으로서 지닌 자기의 한계를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감춰진 가능성과 힘을 계발하여 발휘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생명이 위축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예수님은 일하셨습니다. 그분은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병을 고쳐서, 그 환자를 위축된 삶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상 생활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정신적 혹은 육체적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그 위축의 불행에서 벗어나, 정상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그런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그런 가능성과 힘이 감춰지고, 계발되지 않은 것은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우리 자신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에 얽매여 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친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으로, 우리 주변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찾지도 염려하지도 마시오. 그런 것은 모두 세상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으시오.”(루가 12,29-31).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먹고 마시는 일에만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주변을 본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비로소 감춰져 있던 우리의 가능성과 힘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위축되어 살던 우리 주변의 생명들이 충만한 삶에로 돌아올 것이고, 그 사실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십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차별을 만들어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가진 이와 갖지 못한 이, 병든 이와 건강한 이, 의인과 죄인,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우리는 갈라놓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차별과 갈등을 없애십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신 곳에, 그런 차별과 갈등은 사라집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하느님의 일은 복음서들이 전하는 이야기들 안에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읽고 배워서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게 합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우리는 세례에서 약속하였습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중풍병자(마르2,1-12).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
둘째는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셋째는 네 사람에 의해 예수님께 온 중풍병자,
넷째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네 사람이다.
다섯째는 예수님에 말씀을 듣기보다는 듣고 판단하고 있는 율법학자의 모습이다.

나는 이 다섯 부류의 모습에서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내가 이 다섯 부류 중에 어느 한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면 중풍병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복음을 전하고 있으면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네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늘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고 율법학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이나 잡고 판단하고 있으면 늘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어떤 사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가? 그런 일을 하라고 불리 움을 받은 사람인가?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복음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모여드는가?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중풍병자일지도 모른다.
또 당신은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 중에 한 사람인가? 예수님 주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당신은 많은 은혜를 받고 중풍병자가 중풍병에서 치유되었듯이 당신이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받고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었고 매 주일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쁨이 없고 받은 은혜도 없다면 당신의 신앙 생활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다. 즉 복음을 듣고 복음에 의한 복음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병이나 치유받으려는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중풍병자의 모습일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고 성당에 다니고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아무런 느낌도 없고 기쁨도 없고 받은 은혜도 없이 무감각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듣고 있다면 그것이 중풍병자 아니고 무엇인가? 중풍병자의 특징은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누워 있으면 있는 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죽은 이의 모습이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의 모습이요, 죽으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 주는 시체의 모습이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모습이 당신의 모습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이요,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고 봉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중풍병자를 보시고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은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요, 사람을 살리는 봉사이다. 나의 믿음은 나만을 위한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나도 구원받고 다른 사람들도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살려 줄 수 있고 고쳐 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를 살리고 다른 이를 살리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살릴 수 있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하고 희생을 치루 어 야 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보라!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그들이 중풍병자를 설득해서 들것에 들고 예수님께 데려 오는 것도 힘든 일이고 또 예수님께 데려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뚫는 일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벗기고 구명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 것을 달아내려 보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 이 네 사람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었으며 힘든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노력하였고 인내하였으며 희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드디어 중풍병자가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이 사도이다. 하느님의 사람이요, 신앙인의 삶이고 자세이다.

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는 하였지만 그 다음은 중풍병자에게 달렸다. 항상 결정적인 치유는 본인 자신에게 달려 있다. 다른 이들은 도와줄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 목마른 이를 우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대신 마셔 줄 수가 없듯이 네 사람의 역할과 중풍병자의 몫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것까지는 네 사람이 할 수 있었지만 중풍병자가 치유받고 못받는 것은 전적으로 중풍병자에게 달려 있다.

만일 중풍병자가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하더라도 그가 원하지 않았으면 강제로 데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셨을 때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들것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랫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중풍병자가 치유받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고치지 못했는데 낮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어떤 특별한 진찰도 하지 않고 다만 보시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한 마디 말씀만을 듣고 일어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믿음이다.
또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결국 중풍병자가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 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병자의 믿음과 치유의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의 합작품이다. 그 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은 사람은 믿음을 복음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쉽게 어떤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고정관념과 얕은 지식으로 판단만 하는 율법학자들은 아무 은혜를 받지 못했다.
그럼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의 죄였다. 죄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정관념으로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을 앓고 들것에 누워 지내는 병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해야하고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묵상 글 : 유 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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