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8일 사순 제4주일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3,14-21)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은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으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마침내 그들은 주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칼데아 임금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성전과 궁궐을 불태우고 살아남은 자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유배시킨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리셨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선물로 구원된 우리는 선행으로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제2독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며, 그분을 믿는 것이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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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병행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깊이 깨닫지 못하면 하느님도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구차한 변명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들의 입을 막기에 급급했습니다. 자신들이 인정하기 싫은 아픈 진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남에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려면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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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들어 올린 ‘광야의 뱀’은 민수기에 나옵니다. 이집트를 벗어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갑니다. 모세의 인도로 희망에 부풀어 떠납니다.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했기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은 사기를 꺾습니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밤낮으로 걷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조금씩 이집트의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불평합니다. ‘우리를 광야에서 죽일 셈이냐?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게 해 다오.’ 불평은 끝내 하느님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생존 자체가 기적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개입이 시작되었습니다. ‘뱀’이 나타난 것입니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그제야 백성은 뉘우치며 도움을 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계시가 모세에게 내립니다. ‘구리로 만든 뱀’을 장대에 달아 놓고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뉘우치는 마음으로 보는 이는 병이 나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을 ‘본다는 것’은, 그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 안에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 사순 시기의 넷째 주일의 교훈은 여기에 있습니다. 시련 앞에서도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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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라는 책을 보면, 그 첫 번째가 ‘사랑에 송두리째 걸어 보기’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이야말로 인간 사랑에 송두리째 거신 분이십니다.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하여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기꺼이 내놓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는 것을 막으시고, 당신의 소중한 외아들을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말은 말이고 삶은 삶이다.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민수21,6-9).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라면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순명이라고 합니다. 순명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신부님은 할아버지께 세례식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허, 그런 질문하지 마세요,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내 마누라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자기 죄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래도 내 마누라인데 잘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죠?
남의 죄 때문인가요? 아, 내 죄 때문이라고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이래요!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기 위해 외 아들을 보내 주셨다고 하셨다. 하느님의 뜻은 이 세상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함이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얼마나 감격스런 말씀인가?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을 보내셨고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으며 감사드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선물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단 일분이라도 죽어 가는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겠는가? 오늘도 병원에 가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어디 그뿐이랴 살아날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말기 암 환자들을 보라. 그저 죽음이다가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대책이 없이 슬픔과 절망 속에 침상을 지키고 있는 환자나 가족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몇 년 만이라도 생명을 연장시켜 줄 수 있는 약이 있다면 돈이 문제이겠는가?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그 약을 구해서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을 믿기만 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겠다는 이 엄청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전혀 놀라지도 감사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아무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갈라진다. 즉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단순히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이다.
즉 믿는 사람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고 믿지 않는 이는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둘 다 똑같이 에너지를 쏟고 있지만 믿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에너지를 진리를 실천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에너지를 악을 행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 결과 믿는 이는 점 점 더 빛으로 나아가고, 믿지 않는 이는 빛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어둠으로 간다.
내가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단순히 말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드러난다. 즉 나의 삶이 나날이 빛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어둠으로 가고 있는가? 를 보면 내가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분할 수 있다.
믿는 사람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진리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라고 했다. 즉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믿는 사람으로서 진리를 실천하려면 말씀을 알아야 하고 늘 말씀을 자기 품속에 품고 살아야한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다.
시편 작가는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 118, 105)라고 말씀 하지 않으셨는가? 따라서 믿는 이는 즉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매일 매일 "말씀 내리시는 대로 저는 받아 삼켰습니다. 만군의 야훼 하느님, 이 몸을 주님의 것이라 불러 주셨기에 주님의 말씀이 그리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했습니다."(예레 15,16)라고 했듯이 말씀을 먹어야 한다.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몸에서 빛이 발산되어야 한다. 만나는 사람에게 빛으로 다가가고 따뜻한 빛이 들어가게 해야 한다. 빛을 발산하는 사람에게는 추운 사람들이, 외로운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헤매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빛을 쪼이기 위해서,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희망을 얻기 위해서, 기쁨을 되찾기 위해서 모여들 것이다. 그래서 만나고 나면 깨달음을 얻게 되고, 따듯함을 느끼고 돌아가게 되고, 마음에 평화를 얻고 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점 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반대로 악을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왔던 사람마저 하나 둘 그 사람 곁을 떠나 갈 것이다. 그리고 만나자고 해도 잘 만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만나고 돌아서면 또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인데 하고 후회하고 돌아서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즉 악을 저지르는 사람과 만나고 나면 악의 흔적이 내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상했다든지, 기분이 나쁘다든지, 더 큰 실망을 갖게 된다든지, 아니면 더 어둠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든지 될 것이다.
믿는 사람이라면서 이런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직접적으로 악을 저지르지는 않는 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빛을 주지 못한다면 즉 빛으로 나아가게 도와주지 못한다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지 않는 사람이요,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시간을 낭비하고, 힘을 낭 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든지 나를 만나는 사람이 빛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 이어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을 단죄하려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일이다.
매주 월요일마다 복음 묵상 나누기를 하는 그룹이 있다. 그 자리에서 어느 자매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 온 삶을 돌아보니까 헛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그 동안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복음을 묵상하면서 자기의 신앙생활이 전혀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 아주 복음과는 먼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너무나 큰 죄를 지었노라고 하면서 지금 남편이 살아 있으면 진정으로 용서를 청하고 싶다면서 울먹였다.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단지 말로만 믿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구체적이고 발전적이며 그리고 나를 성숙하게 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것은 진리를 실천하면서 빛으로 나아가는 생활이어야 한다. 우 리가 그 동안 진리를 실천하면서 생활한 믿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빛으로 다가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성장했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이었다면 결국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사람으로서 진리를 실천함으로써 나의 행실이 하느님 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야 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이 놀라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도록 우리가 빛을 추어 주어야 한다. 나의 삶을 통해서.
-유 광수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