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2000년 부활 제2주일부터 해마다 이날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 다음 주일은 전통적으로 ‘사백 주일’로 불리었습니다. 부활 대축일에 세례를 받은 영세자들이 영혼의 결백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부활 팔일축제를 지낸 다음 부활 제2주일에 벗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지역에서는 이날 어린이들의 첫영성체를 거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보여 주신 자비를, 부활의 신비를 기념하고 거행하는 전례 안에서 찬양하고자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제정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전해 주십니다. 성령의 가장 큰 은혜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구체적 행위입니다. 죄의 용서만큼 기쁘고 평화로운 것이 없습니다. 내 죄를 용서받을 때도,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때도.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의 은총 없이 내 죄를 용서받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겸손하게 성령의 은총을 구합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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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아름다운 일은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아무 탓 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요셉이 자기를 웅덩이에 처넣고 미디안 상인에 팔아 버린 형제들을 이집트 궁궐에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는 눈물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도 용기를 내어 우리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이웃을 용서합시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그는 밖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 숨어 있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에 찬 토마스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못 믿겠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토마스는 스승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다시 살아나실 거라면 왜 죽어야 하셨는가? ‘죽음의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지나친 발언이었습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십니다. 순전히 토마스를 위한 발현입니다. 그러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 말씀에 토마스는 엎드립니다. 눈으로 확인했기에 엎드린 것은 아닙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자기를 위해 ‘한 번 더’ 나타나신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이론은, 사람을 설득할 수는 있어도 승복시키지는 못합니다. 사랑과 애정만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승복하게 합니다. 이후 토마스는 주님의 사도가 되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는 결코 의심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녀가셨던 날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고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직접 당신을 만져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토마스는 그제야 예수님의 몸을 보고 만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어느 유태인이 학살당하기 전 지하 감옥 벽에 이런 글을 써 놓았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을 믿습니다. 주위에 사랑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지만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비록 침묵 속에 계실지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믿음은 비록 지금 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지만, 구름 너머에 태양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들리지 않지만 침묵하며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마음을 모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주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거기에는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습니다. 그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는 고백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믿음은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以 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김영수 신부-
보아야만 믿겠다는 토마스의 말처럼 사람은 백번 듣는 것보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인정하고 믿게 됩니다. 하느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욥기 19, 27)
인생의 의문과 고통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뵙고자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고,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둠과 혼돈을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참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뵙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업적을 보아야 합니다. 보는 것이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준다 하더라도, 믿음 그 자체가 보는 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을 뵙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로 마음을 향해야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 것이고, 바로 그런 하느님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의 눈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육안(肉眼)이고, 그것보다 발전된 것이 뇌안(腦眼)이며, 그것보다 깊은 것은 심안(心眼)이고, 가장 심오한 것은 영안(靈眼)입니다.
우리가 지닌 네 개의 눈 중에서 어떤 눈으로 사물과 현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볼 수 있는 내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욕망의 수단으로 바라볼 것이고, 뇌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생각하고 따지는데 필요한 내용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심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바라보는 현실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진리를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눈은 모든 사물 안에 담긴 본질인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 뵙기를 청하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요한 1, 39)고 하신 것은 보아야만 믿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그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신앙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현존하셨던 그 분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토마스와 똑 같은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짊어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수 많은 사랑의 기적들을 통해서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은 그의 불신을 드러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자체로는 토마스를 탓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일입니다.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보고서도 믿지 않는 것보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몇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 중 하나는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해서 항상 그보다 덜 중요한 것만을 찾아내기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그 앞에 덜 중요한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뵙는 일은 감정이나 이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으며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하는 일, 사랑을 위하여 견디어 내는 십자가만이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욥기 19, 27)
인생의 의문과 고통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뵙고자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고,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둠과 혼돈을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참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뵙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업적을 보아야 합니다. 보는 것이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준다 하더라도, 믿음 그 자체가 보는 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을 뵙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로 마음을 향해야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 것이고, 바로 그런 하느님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의 눈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육안(肉眼)이고, 그것보다 발전된 것이 뇌안(腦眼)이며, 그것보다 깊은 것은 심안(心眼)이고, 가장 심오한 것은 영안(靈眼)입니다.
우리가 지닌 네 개의 눈 중에서 어떤 눈으로 사물과 현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볼 수 있는 내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욕망의 수단으로 바라볼 것이고, 뇌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생각하고 따지는데 필요한 내용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심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바라보는 현실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진리를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눈은 모든 사물 안에 담긴 본질인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 뵙기를 청하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요한 1, 39)고 하신 것은 보아야만 믿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그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신앙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현존하셨던 그 분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토마스와 똑 같은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짊어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수 많은 사랑의 기적들을 통해서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은 그의 불신을 드러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자체로는 토마스를 탓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일입니다.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보고서도 믿지 않는 것보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몇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 중 하나는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해서 항상 그보다 덜 중요한 것만을 찾아내기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그 앞에 덜 중요한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뵙는 일은 감정이나 이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으며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하는 일, 사랑을 위하여 견디어 내는 십자가만이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요한복음. 20,19-31
묵상길잡이
현대인들은 실험으로 증명되는 과학적인 것만 믿으려 한다. 그러나 부활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사건은 아니다. 내 눈으로 봐도 믿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서로 공동으로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1. 토마스 사도는 아주 특별한 사람인가?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본다. 토마스 사도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는 사도들의 말을 믿기보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며 자신의 눈과 손으로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고자 한다.
토마스 사도는 체질적으로 의심이 많고 매사를 철저히 확인하지 않고는 잘 믿지 못하는 분인가? 아니면 평소에 예수께 대한 신뢰나 믿음이 부족한 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들자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11,16)하고 말 할 정도로 예수께 대한 강한 열정과 믿음이 있었다.
며칠 전에 죽고 묻혔던 스승이 다시 살아 나셨다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토마스 사도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복제 인간의 양산(量産)을 서두르며, 우주탐험을 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연과학적인 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는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 부활, 천당, 지옥, 천사, 악마 같은 종교적 진리에 대해서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2. 부활은 이미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 테입이 있다면, 사도들에게처럼 나에게도 발현해 준다면 나도 믿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앞에서 죽었던 부모나 가족이 나타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당황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이 날지도 모른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는 상식적으로 또 아무리 눈으로 봐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말하자면 부활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부활은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를 동산지기인줄로 알았고(요한20,13-14),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본 제자들도 예수를 유령으로 착각했다.(루가24,38)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루가24,16)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부활 사건은 신앙의 차원이지 감각의 차원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의 참뜻을 깊이 새겨야 한다.
3. 부활 신앙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열어준다
오늘 사도행전의 제1독서에는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체험한 원시교회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3) 부활을 믿게 된 원시교회 신자들은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가진 것을 공동으로 나누는 자발적인 공산주의(공동생활)를 실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을 넘어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활한 예수님의 계속되는 발현을 체험하면서,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재물이나 부귀영화, 쾌락이나 권력 따위는 참으로 하찮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도 바오로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3,8) 고 고백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에겐 이 세상의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돈, 쾌락, 권력을 위해 못할 짓이 있겠는가? 보험금 때문에 처자도 부모도 죽이고, 부모 유산 때문에 형제간에 칼부림하고, 실직 당한 남편과 자식들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자기 편하게 살겠다고 훌훌 떠나고, 부정과 비리를 밥 먹듯 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왜 이 모양인가?
우리가 세상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 아닌가? 참 신앙인은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에 우리가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몸소 사신 그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도 그분이 들어가신 참 생명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부활은 매일의 삶 속에서 싹트고 자라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유영봉 신부-

토마의 불신앙
-김훈일 신부-
토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토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토마가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후에 그는 신앙공동체인 사도들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의 불신앙을 더욱 키운 것입니다. 둘째로, 토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체험과 경험을 중요시하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네가 믿는 방식과 내가 믿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중에 당신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가 한 일들을 보아서라도 나를 믿으라고 했으나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했습니다.?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것을 목격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생각해서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불신앙에 빠질 때가 가끔 있습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나의 재능이나 세상의 힘과 권력에 그리고 무속에 의지하려 합니다. 또 너무 강렬한 체험만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기적이 나타났다거나 하는 곳만을 찾아다닙니다. 우리는 불신앙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늘 신앙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는 각자의 체험을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풍부하게 합니다. 기적을 찾기보다 성경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을 때 마귀의 유혹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야기와 토마스 사도가 신앙 고백한 이야기였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집에 모여 있습니다. 때는 안식일 다음 날 저녁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이면 오늘의 주일입니다.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하신 일을 함께 회상하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함께 하신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성찬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성찬 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첫 번의 발현에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같은 장소와 시간에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후는 일주일 후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같은 주일 성찬집회 때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 양식 중 가장 단순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고, 그분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셨고, 그 성령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는 곳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죄의 용서가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는 유다인들의 화법에서 온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2,7)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모상에다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숨을 받아 새롭게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면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수님이 실천하신 것이고, 이제는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사는 제자들이 실천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 제1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느님 안에 자기 삶의 기원이 있다고 믿는 하느님의 자녀는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유럽 중세 초기에 유럽으로 흘러 들어와 정착한 야만인들을 대상으로 발생한 신앙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 로마제국 국경 밖에 살면서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던 민족들이 제국의 군사력이 쇠퇴하자 제국영토 안으로 몰려들어와 유럽 땅에 정착한 것입니다. 중학교 서양사 교과서가 야만인들의 침입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이주 후 로마제국의 문명과 더불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추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면서, 교회는 먼저 각자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각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일에 대해 보상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발생한 개인 고백을 수반한 고해성사 제도였습니다. 죄를 성찰하고 고백하여 자기 죄를 인정하고, 신부로부터 보속을 받아 행해서 자기 책임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교회 안에 실천되고 있는 개인 고백 고해성사의 유래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문맹이고, 자기 잘못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던 시기에 도입된 관행입니다. 오늘 현대인은 자기가 잘못 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기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를 강요하면,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과거에 필요해서 만들어진 고해성사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복음보다 높이 평가하며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해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다가 목숨까지 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사는 사람은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은폐하면, 예수님의 숨결 따라 새롭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또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에게 유보된 특권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 안에 살라계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 위에 군림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배워 실천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 후 100년 경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그 시대 교회의 실태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 믿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사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섬기는 사람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살아 계셔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숨결로 살아 실천되는 교회 공동체라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가 모르던 일이 아닙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용서가 없고 사랑이 없었던 인류역사는 없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예수님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현재 우리의 실천이지만, 장차 하느님 안에 겨자나무와 같은 큰 결과를 기대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첫 번의 발현에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같은 장소와 시간에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후는 일주일 후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같은 주일 성찬집회 때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 양식 중 가장 단순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고, 그분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셨고, 그 성령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는 곳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죄의 용서가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는 유다인들의 화법에서 온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2,7)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모상에다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숨을 받아 새롭게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면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수님이 실천하신 것이고, 이제는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사는 제자들이 실천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 제1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느님 안에 자기 삶의 기원이 있다고 믿는 하느님의 자녀는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유럽 중세 초기에 유럽으로 흘러 들어와 정착한 야만인들을 대상으로 발생한 신앙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 로마제국 국경 밖에 살면서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던 민족들이 제국의 군사력이 쇠퇴하자 제국영토 안으로 몰려들어와 유럽 땅에 정착한 것입니다. 중학교 서양사 교과서가 야만인들의 침입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이주 후 로마제국의 문명과 더불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추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면서, 교회는 먼저 각자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각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일에 대해 보상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발생한 개인 고백을 수반한 고해성사 제도였습니다. 죄를 성찰하고 고백하여 자기 죄를 인정하고, 신부로부터 보속을 받아 행해서 자기 책임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교회 안에 실천되고 있는 개인 고백 고해성사의 유래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문맹이고, 자기 잘못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던 시기에 도입된 관행입니다. 오늘 현대인은 자기가 잘못 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기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를 강요하면,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과거에 필요해서 만들어진 고해성사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복음보다 높이 평가하며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해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다가 목숨까지 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사는 사람은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은폐하면, 예수님의 숨결 따라 새롭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또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에게 유보된 특권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 안에 살라계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 위에 군림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배워 실천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 후 100년 경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그 시대 교회의 실태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 믿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사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섬기는 사람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살아 계셔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숨결로 살아 실천되는 교회 공동체라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가 모르던 일이 아닙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용서가 없고 사랑이 없었던 인류역사는 없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예수님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현재 우리의 실천이지만, 장차 하느님 안에 겨자나무와 같은 큰 결과를 기대하는 신앙인들입니다.
